고삐 풀린 뇌
인간 뇌의 진화를 고삐 풀린 성선택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가설. 제프리 밀러는 이 가설이 아닌 적응도 지표로서의 뇌 가설을 선호한다.
질주 가설의 개연성
만약 호미니드 남성의 창의적 지능에 변이가 존재하고, 또 그 창의적 지능이 유전자에 의해 대물림된다면, 성선택의 세 가지 전제조건들 가운데 두 가지가 충족된다. 나머지 한 가지 조건은 호미니드 여성이 어떤 이유에서 창의적 지능에 대한 성적 선호를 보이는 것이다. 이 조건만 충족되면 뛰어난 창의적 지능을 가진 남성은 더 많은 섹스 파트너를 매료시키고, 더 많은 자식을 낳는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조상이 완전한 일부일처제 하에 있지 않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창의적 지능이 구태여 호미니드에게 생존 이익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창의적 지능은 질주 과정을 통해 순전히 성적 장식으로서 진화할 수 있다. 도구를 만드는 데도, 아프리카의 다른 호미니드 종들과 경쟁하는 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이 시기에 왜 우리 조상들은 그토록 빨리, 그토록 극단적인 크기까지 뇌를 진화 시켰을까? 1990년대 초기에 나는 질주 과정이야 말로 이것을 설명해줄 가장 유력한 이론이라고 여겼다. …
다른 이론가들도 몇 가지 다른 양성 되먹임 후보들을 제안했다. 1981년에 에드워드 윌슨은 큰 뇌 덕분에 복잡한 문화가 생겼고, 이에 대한 되먹임으로 뇌가 더 커졌다는 이론을 제기했다. … 리차드 도킨스는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인간의 뇌는 밈이라는 학습된 문화단위의 창고라고 했다. 뇌가 커지면 더 많은 밈을 수용할 수 있고, 밈은 다시 더 큰 뇌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 1976년 니콜라스 험프리는 사회적 지능에 대한 압력이 Positive feedback loop으로 변함으로써 뇌를 진화시킨 추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1988년 앤디 위튼(AnswerMe)과 리처드 번(AnswerMe)은 사회적 속임수와 계략의 생존이익에 주목함으로써 니콜라스 험프리의 견해를 확장시켰다. … 양성 되먹임이 발생할 또 하나의 가능성은 집단 내의 사회적 경쟁이 아니라 집단들 사이의 경쟁이었다. 1989년 리처드 알렉산더(AnswerMe)는 부족들 사이의 전쟁은 각 부족이 서로 더 뛰어난 기술적, 전략적 지능을 갖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일종의 군비경쟁을 촉발시킨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이러한 군비경쟁이 뇌의 크기와 지능을 동반상승시켰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이론들은 얼마간 타당성이 있다. 문화적, 사회적, 군사적인 선택압은 아마도 중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양성 되먹임 고리들은 너무 사변적으로 보였다. 당시의 생물학자들은 이것들을 진화의 원동력을 모신 명예의 전당에 끼워주지 않았다. 또 이 모델들은 영장류 이외의 종에서 나타나는 흥미로운 형질들에는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영장류와 인간의 진화에만 국한된 특수한 모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널드 피셔의 질주 과정은 달랐다. 우선 주류 진화 이론의 일부였고, 영장류 이외의 종에서 나타나는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들고, 장식적인 형질들을 설명해 줄 유력한 후보였다. —p116-118, The mating mind
문제점
마음의 진화는 단일한 질주 사건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느리다:
인류의 뇌 크기는 2백만 년 동안 세 배가 커졌다. 이것은 매크로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엄청난 속도다. 기왕에 밝혀진 다른 어떤 게통의 뇌 크기 증가보다 훨씬 빠르다. 음악, 미술, 언어, 유머, 지능은 모두 이 폭발적인 뇌 성장의 시기에 진화했다. … 하지만 … 마음의 진화는 단일한 질주 사건으로 설명하기에는 되레 너무 느리다. 2백만 년은 인간과 같이 번식 속도가 아주 더딘 유인원조차 10만 세대를 거쳐야 하는 긴 시간이다. 그 긴 세월 동안 뇌 질량이 고작 1kg(한 세대 당 0.01g씩) 늘어났을 뿐이다. 만약 지속적인 질주 과정이 개입했다면 이보다 훨씬 빨랐어야 한다. 유전성이 보통이고 뇌 크기의 변이가 보통이라고 가정할 때, 내 추산에 따르면 질주는 한 세대당 적어도 1g씩 뇌 크기를 증가시킬 수 있다. 이런 대략적인 추산은 야생의 다른 종들에서 측정되는 성선택압들 가운데 가장 낮은 수치를 적용한 것이다. 이 추산이 맞다면 하나의 지속적인 질주 사건은 인간의 뇌가 진화한 속도보다 최소한 100배는 빠르다. …
이 속도 문제는 거의 모든 진화가 그랬듯이 인간의 뇌의 진화도 멈췄다 달렸다 했다고 가정함으로써 풀릴지도 모른다. … 화석 증거에 따르면 인간의 뇌 크기는 몇 차례의 극적인 폭발을 겪는다. 그 가운데 하나는 450g이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가 600g이었던 호모 하빌리스의 뇌로 이행한 것이다(하지만 호모 하빌리스는 인간의 직계조상이 아니었다는 것이 지금의 정설이다). 또 한 차례의 폭발은 170만 년 전 초기 호모 에렉투스의 800g짜리 뇌를 낳았다. 그 뒤 백만 년 동안 호모 에렉투스가 진화하는 동안에도 아마 몇 차례의 폭발이 있었을 것이다. 또 한 차례의 폭발이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1,200g짜리 뇌를 낳았다. 마지막 폭발은 10만 년 전 현생 인류의 1,300g짜리 뇌를 낳은 것이다. 각각의 폭발은 지질학적 시간 잣대로는 매우 짧은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래도 수백 혹은 수천 세대 동안 지속되었던 과정으로, 표준적인 선택압이 어떤 형질을 주조해 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아직 화석 증거가 불충분한 탓에 이러한 폭발들을 추동한 것이 고삐 풀린 성선택 같은 아주 빠른 과정이었는지, 아니면 보통의 생존 선택처럼 느린 과정이었는지 똑부러지게 말하기는 어렵다. …
문제는 왜 모든 질주 과정이 하나같이 뇌의 크기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고 애오라지 증가시키는 쪽으로 작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똑같은 확률로 어떤 종이 가급적 가장 작은 뇌로 가급적 가장 우둔한 짓을 하게 만드는 쪽으로도 질주 과정이 나타날 수 있다. 우둔함이 생존에 타격을 주더라도 그것이 성적 매력을 풍기기만 한다면 실수투성이의 무능력한 종이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
다음 장에서는 이 일방적 전개를 훨씬 더 잘 설명해 주는 또 다른 성선택 과정을 검토할 것이다. (see Brain as a fitness indicator —p125-129, The mating mind
고삐 풀린 성선택에 의한 적응 형질은 큰 성별 차이를 갖는 특성이 있으나, 인간의 경우 남성과 여성의 뇌에 별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삐 풀린 뇌 이론과 관계된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이러한 성선택의 관할 하에 있는 일체의 형질은 큰 성별 차이를 낳는다는 점이다. 수컷 공작의 꼬리는 암컷 공작의 꼬리보다 훨씬 크다. 만약 인간의 뇌가 세 배로 커진 이유가 고삐 풀린 성선택 때문이라면, 뇌의 크기 증가는 남성들에게만 국한되었어야 한다. … 그런데 그렇지 않다. 남성의 뇌는 평균 1,440g이고, 여성의 뇌는 평균 1,250g이다. 신체 크기의 차이를 감안하면 그 차이는 100g으로 줄어든다. … 창의적 지능도 마찬가지다. 만약 창의적 지능이 고삐 풀린 성선택을 통해 진화했다면 남성의 IQ가 여성의 IQ보다 훨씬 높아야 한다. 물론 특정한 인지 능력에서 남녀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주 미미한 정도다. 또 남성이 뛰어난 분야도 있지만 여성이 더 뛰어난 분야도 있다. —p129-130
나는 남녀차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쪽으로 작용했음직한 몇 가지 요인들을 검토해보았다. 첫째 남성과 여성의 유전적 상관성, 구애 능력과 짝 고르기 능력의 겹침, 세 번째 짝 고르기의 쌍방향성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요인인 짝 고르기의 쌍방향성(See Mutual mate choice)은 순수한 질주 과정과 아귀가 맞지 않다.
나는 인간의 경우에는 짝 고르기의 쌍방향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부득이 고삐 풀린 뇌 이론을 폐기한다. 질주 이론을 추켜올리는 것으로 이 장을 열었지만, 이제 그것을 다시 무덤 속에 묻는 것으로 이 장을 다는다. … 다음 장에서는 나는 짝 고르기의 쌍방향성이 성립되는 성선택 모델을 살펴볼 참이다. 이 모델은 암수 혹은 남녀가 어떻게 성적 장식을 통해 이성에게 자신의 적응도를 선전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짝 고르기 기능은 유성생식 자체의 기원과도 맥이 맞닿는다. —p153-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