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한 야만인
자연 상태의 인간은 욕심이 없고 평화로우며, 탐욕, 근심, 폭력과 같은 병폐는 문명의 산물이라는 믿음.
스티븐 핑커의 의견
현대 사회에 만연하는 신성한 미신적 이론들(빈 서판,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 중 하나.
기원:
고상한 야만인이란 이름은 흔히 철학자 장-자크 루소에게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1670년에 출판된 John Dryden의 “그라나다 정복”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자연이 빚어 낸 최초의 인간처럼 자유롭다. 예속을 강요하는 비천한 법이 생겨나기 전처럼, 고상한 야만인이 거칠게 숲 속을 뛰어다니던 때처럼.
장-자크 루소의 견해:
수많은 저자들이 인간은 선천적으로 잔인하며 따라서 이를 교정하려면 상시적 경찰 제도가 필요하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인간이 짐승의 우둔함과 문명인의 유해한 양식으로부터 똑같이 먼 곳에 놓인다면, 원시 상태의 그보다 더 온화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p32
“고상한 야만인”은 홉스의 견해에 대한 반발로 제시된 견해였다:
홉스는 아주 다른 견해의 주인공이었다. 따라서 인간이 그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 공동의 힘을 갖지 못하고 사는 동안에는 이른바 전쟁이라는 상황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그것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벌이는 싸움이다.
홉스는 사람들이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자치권을 군주나 지배 집단에게 넘겨주는 것이라 믿었다. 그는 그것을 천지 창조가 시작될 때 여호와에게 굴복당했던 바다 괴불의 히브리어 이름을 따서 리바이어던이라 불렀다. —p32-33, publications/The blank slate
메트 리들리의 의견
당연히 객관적이라고 간주되는 TV 프로그램들이 늘 보여주고 있듯이, 인간은 대자연의 엄연한 실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의 실상을 멋대로 왜고하고, 실낱 같은 단서라도 붙잡으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돌고래, 죽은 가족을 애도하는 코끼리) 동물의 미덕을 추켜주려고 혈안이 되며, 동물의 잔혹성은 인간이 가져온 일탈 행동이라고 변호해 주기에 급급하다. 최근 스코틀랜드 연안에서 돌고래들이 참고래들을 공격하는 모습이 관찰되었을 때, 동물 “전문가들”은 이 일탈 행동을 뭔지는 모르지만 어떤 공해의 탓으로 돌렸는데, 결국 그들은 그에 관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음을 시인했다. 우리는 자연의 부정적 측면을 외면하고 긍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감상에 빠진다.
고상한 야만인의 신화가 사라지지 않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원주민에 대해서도 우리는 위선적 감상주의를 드러낸다. 장-자크 루소의 시대에 고상한 야만인 신화는 사회적 미덕에 관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생태론적 형식을 취한다. …
인디언은 자연과 하나였고 자연을 숭배했으며 불가사의할 정도로 자연과 깊게 감응했을 뿐 아니라, 사냥을 하면서도 사냥감인 동물 종 자체에는 해를 입히지 않도록 철저한 절제의 규칙을 준수했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다. 그러나 유적 조사의 결과는 이 같은 희망적인 신화에 의문을 던진다. 이리는 늙거나 아주 어린 짐승만 잡아먹지만, 인디언이 사냥한 엘크는 대부분 한창 때의 것들이다. 인디언은 황소보다는 암소를 더 많이 잡았고, 오늘날만큼의 수명을 유진할 엘크는 당시 거의 없었다. 생태학자 찰스 케이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이 큰 짐승을 보호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고 결론내렸다. —p298-301
아마존 인디언들이 사냥감의 과잉 도살을 예방하기 위해 사냥 패턴을 체계적으로 자제한다는 증거를 찾아내려는 연구는 이제까지 네 차례나 있었다. 그러나 네 가지 연구 모두에서 희망적 가설은 부정되었다. Ray Hames는 야노마모족과 예콰나족은 사냥감이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냥감이 많은 지역은 으레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냥 지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고갈 지역을 거쳐야 한다. 그들이 환경 보호를 실천한다면 고갈 지역을 지나는 동안 만나는 사냥감은 모르는 체 지나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잡을 가치가 있을 만큼 큰 사냥감이고 그들 손에 무기가 있는 이상 늘 예외 없이 고갈 지역에서 만난 사냥감을 놓치지 않았다. —p309, 이타적 유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