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판
인간의 마음은 어떤 고유한 구조와도 무관하며, 사회나 그 자신이 그 위에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새겨 넣을 수 있다는 개념으로 핑커가 비판적 의미로 사용. 깨끗이 닦아낸 서판(scraped tablet)이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의역한 말.
핑커의 의견
현대 사회에 만연하는 신성한 미신적 이론들(빈 서판,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 중 하나.
기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기원을 철학자 존 로크에 두지만, 사실 그는 이 말을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 다음은 인간오성론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제 마음이 가령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고 아무 개념도 담겨 있지 않은 흰 종이라고 가정해보자. 그것은 어떻게 채워지는가? 그 종이는 어떻게 인간의 분주하고 무한한 공상에 의해 거의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게 그려지는 광대한 내용을 획득하게 되는가? 그것은 어떻게 이성과 자식의 모든 재료를 갖게 되는가? 이에 대한 내 대답은 한마디로, ‘경험으로부터’라는 것이다.
로크가 겨냥한 공격 대상은 인간이 수학적 이상, 영원한 진리, 신의 관념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본유 관념 이론이었다. —p29, 30
사회 과학, 인문학에서 빈 서판 관점의 역할:
지난 세기 동안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많은 분야에서 빈 서판 학설은 합의된 토대로서 작용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심리학에서는 모든 생각, 감정, 행동을 몇 가지 단순한 학습 메커니즘으로 설명해왔다.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모든 관습과 사회 제도를 주변 문화가 어린아이들에게 시행하는 사회화(말, 이미지, 전형, 롤 모델, 보상과 처벌의 가능성들로 구성된 체제)의 산물로 설명해 왔다. 그에 따라 인간의 사고 방식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수많은 개념들(감정, 혈족 관계, 성, 질병, 자연, 세계)이 오늘날 “창조된” 것 또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설명된다. —p30,31
정치적, 윤리적 신념:
빈 서판은 또한 정치적, 윤리적 신념을 위한 신성한 경전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 학설에 따르면 인종, 인종 집단, 성, 개인들 간의 어떤 차이도 선천적 체질이 아니라 경험상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육아, 교육, 대중 매체, 사회적 보상을 개혁함으로써 개인의 경험을 바꾸면, 그 개인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성이나 인종 집단 등 이른바 선천적 특성들을 근거로 삼아 차별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합리한 일이다. —p31
빈 서판 이론의 도덕적 매력:
빈 서판 학설의 가장 큰 도덕적 매력은 “0 == 0”이라는 간단한 수학적 사실에서 나온다. 그 덕분에 빈 서판은 정치적 평등을 보장하는 원리로 이용될 수 있다. 빈 것은 빈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빈 서판이라면 모두 평등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반면에 갓난아기의 서판이 비어있지 않다면 각각의 아기는 서로 다른 내용이 새겨진 서판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개인, 성, 계급, 인종은 선천적으로 다른 재능, 관심, 성향을 보일 것이다. …
문제는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면 결국 차별, 억압, 대량 학살이 용인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고 방식에 있다. 평등이나 인간적 권리와 같은 근본적 가치들이 당장 내일 오류로 밝혀질 수도 있는 BlankSlate 학설의 볼모가 되어서는 안된다. —p253,254
[!메모] 피터 싱어도 동물 해방에서 평등의 원칙이 담고 있는 함의는 인간들 사이의 실질적 동등함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처방(prescription)이라고 말한 바 있다. —AK, 2024-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