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친밀한 폭력
머리말. 모든 것의 시작 - 성 역할, 가족, 폭력
남성의 성 역할과 인권은 일치하지만, 여성의 성 역할과 인간으로서 권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여성학인가, 여성 운동인가, 여성주의인가. 심지어 남녀를 불문하고 내 글은 이론, 지식, 학문이 아니라 르포, 사례집, “여성 잡지 기사 같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나느 “과장 아니냐”는 말에 가장 민감하게 분노하고 좌절했다. 물론 그들의 반응은 무지의 산물이지만, 이 문제는 폭력과 고통을 연구하고 싶은 내가 평생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프리모 레비는 평생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 사이의 간극에 시달렸다.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그 비극을 경험하지 않은 ‘특권’을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하는 배려와 관용. 나는 이 부정의를 참을 수 없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고통, 폭력, 슬픔이 연구되기 어려운 이유라고 생각한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이 언어화될 때만이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다. 내 고통이 역삭의 산물이라는 인식만이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1장. ‘아내 폭력’, 가부장제의 축도
가정 폭력이 가족의 위기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가정 폭력은 현재 가족 구조의 한 단면일 뿐이며, 따라서 가정 폭력은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일지 모른다.
‘아내 폭력’은 어떻게 지속되고 재생산되는가
‘아내 폭력’(아내에 대한 폭력)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문제 의식은, 이처럼 한국 사회의 ‘아내 폭력’ 대처 방식이 인권과 성 평등(gender equality) 관점에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기존 가족 보호 입장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부부는 일심동체’, ‘가족 동반 자살’과 같은 언설에서처럼 가족이 하나의 단위(unit)라는 통념은 너무나도 강해서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가족이 하나의 단위라는 담론은 성별과 연령에 따른 가족 구성원들 간의 권력 관계를 은폐하고, 실제로는 가정 폭력에 대한 외부의 중재를 방해하여 폭력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쨌든 이들은 ‘아내 폭력’을 ‘일탈’(비정상) 행위로 보면서 주로 폭력 가정의 인구학적 특성에 주목해 왔다. 즉 폭력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 무엇인지 고찰하는데, 이때 주로 등장하는 상황들은 가해 남편의 의처증, 스트레스, 알코올, 열등감, 경제적 무능력, 분노 따위다. 하지만 이것은 폭력의 원인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폭력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한편, 폭력당한 아내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들은 오랜 폭력으로 인한 폭력의 결과(무기력, 보복의 두려움, 자아 의식 상실, 판단 능력 결여, 모순에 가득 찬 폭력 대처 기술 등등 피해 여성의 상태)를 마치 폭력의 원인인양 설명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가정 폭력(domestic violence, family violence)이 원래 의미인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폭력(violence in the family)이 아니라 가정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family)으로 여겨진다. … 나는 ‘아내 폭력’에 대한 가족 유지적 접근이 과연 ‘아내 폭력’ 문제의 대책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부정적이다.
- 첫째, 여전히 여성을 가족 유지의 핵심적인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 둘째, 가족 내 여성의 역할을 모성의 담당자와 남편의 성적 대상으로만 규정하는 남성 중심적 권력 구조에서는 문제 제기할 수 없다는 점에서,
- 셋째, 여성의 정체성을 사회적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가정적’ 존재로 끊임없이 환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내 폭력’은 인류 공통의 경험이다
시대와 지역, 종교, 인종, 계급, 교육 수준,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를 막론하고 인류가 공통적으로 경험해 온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아내 폭력’일 것이다. … 조선 시대 여성들의 생활 지침서였던 “내훈”의 2권 부부 장에는 “남편을 아버지 같이 섬길 것이나, 혹 그릇된 일을 간하였다가 매를 맞는 일이 있더라도 노하기는커녕 전혀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서양에서도 ‘아내 폭력’은 고대 바빌론 시대부터 현대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어 왔다.
18세기까지 ‘아내 폭력’을 법적으로 규제하지 않다가 근세에 이르러 법 제도가 발달하자 법의 테두리 안에서 ‘아내 폭력’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 19세기 영국의 관습법(common law)은 ‘엄지손가락 법칙(rule of thumb)‘이라고 하여 매의 굵기가 남편의 엄지보다 굵지만 않으면 아내 구타는 정당하다는 원칙을 발전시켰다. 대략적으로 잰다는 뜻인 영어의 ‘rule of thumb (눈대중)‘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이 인용은 잘못된 정보라고 한다.1)
서구에서 20세기 전까지 ‘아내 폭력’이 공공의 관심사로 등장한 적이 두 번 있었다. 영국의 프랜시스 코비(Frances Power Cobbe)는 남편의 발길질로 인해 사망하거나 장애를 얻은 리버풀 지역 여성 노동자들의 연간 사상자 수를 기록하였다. 코비가 그 자료를 토대로 하여 쓴 <아내 학대(Wife Torture in England)>(1878)라는 논문은 ‘아내 폭력’을 페미니즘의 문제로 제기한 최초의 시도로 알려졌다. 그 논문은 이후 영국의 결혼 소송법 가격에 많은 힘이 되었다. 이 법은 남편이 아내를 때려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아내에게 별거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였다.
이후 1920년대까지 ‘아내 폭력’ 문제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1960년대 말 서구를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과 함께 다시 소생하였다. 그간 ‘아내 폭력’은 동물 학대보다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미국의 가족 문제 연구지인 <결혼과 가족(Journal of Marriage and Family)>에는 1939년 창간 이후 1960년대 후반까지 ‘아내 폭력’에 대한 논문이 한 건도 게재되지 않았고, 가정 폭력 중에서도 ‘아내 폭력’은 부차적인 문제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1962년 미국에서 아동 학대가 사회 문제화되자 가정 폭력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고 아내 구타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은 여성 폭력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고 이에 힘입어 ‘아내 폭력’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에서 살해당한 여성의 약 42퍼센트는 이전 또는 현재의 파트너에 의해 죽은 것이다. 방글라데시, 브라질, 케냐, 태국은 50퍼센트에 육박하며 파키스탄에서는 전통적인 여성 억압 문화인 푸르다(purdah, 얼굴과 신체를 가리는 베일)의 영향으로 80퍼센트 정도의 여성이 남편으로부터 학대받는다. 볼리비아 정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매해 10만 건 정도 행해지고 95퍼센트는 처벌되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미국에서 아내 구타는 강간, 자동차 사고, 강도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외상의 이유며 여성이 다치는 가장 일반적인 원인으로 여겨진다. ‘아내 폭력’ 경험률 조사(19861993)에 의하면 칠레/에콰도르/스리랑카/탄자니아 60퍼센트, 일본 59퍼센트, 과테말라 49퍼센트, 우간다 46퍼센트, 케냐 42퍼센트, 벨기에 41퍼센트, 잠비아 40퍼센트, 말레이시아 39퍼센트, 캐나다 27-36퍼센트, 미국 28퍼센트, 노르웨이 25퍼센트, 네덜란드 21퍼센트에 이른다.
리처드 겔즈의 연구에 따르면, 5년간 미국에서 ‘아내 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는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미국인의 수와 비슷하며 미국의 소아마비 환자 모금 본부(March of Dimes)에 의하면 임신 중 남편의 구타가 기형과 유아 사망의 주 원인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 기혼 여성의 5퍼센트는 ‘아내 폭력’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고 호소하였다.
가정 폭력인가, 아내 폭력인가
아내 폭력 참고.
저자가 아내 폭력에 단따옴표 표시를 하는 이유:
나는 이 글에서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단지 아내로 간주되기 때문에 폭력을 당하는 현실에 대한 분석과 여성의 정체성이 더는 아내로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동시에 하고자 하는데, 아내 폭력 용어는 이러한 관점을 모두 포괄하지 못한다. 즉, 이 개념은 아내 폭력이 아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본 연구의 입장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이 문제에 대한 여성주의 정치학의 대안적 가치를 담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한정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아내 폭력이 아니라 ‘아내 폭력’으로 표기한다.
2장. 당사자: 연구자, 피해자, 운동가로서 나
‘매 맞는’ 아내들이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들의 고통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가부장제 가족 제도의 효율적 작동을 위협한다. 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안식처 가족의 신화, 보호자 남성의 신화가 무너진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기혼 여성인 ‘아줌마’로서 나의 위치는 분명 주변적이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주변성, 타자성을 분명히 인식할 때 지식 생산자로서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나는 ‘아내 폭력’의 발생 이유, 해석, 대응의 세 가지 차원에서 글을 구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폭력 발생 이유와 해석의 구별은 인과론적 사고 방식에 익숙한 나의 입장에서만 구분되는 것일 뿐, 증언자의 입장에서는 구별되지 않는 것이었다. …
‘아내 폭력’의 오랜 은폐성은 여성주의 지식인에게 여성 경험의 이론화는 ‘어떻게 아는가, 아는 것을 누가 정하는가’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통찰을 주었다. 이것은 곧 지식의 ‘객관성’, ‘진실성’, 권위, 평가, 정치적 영향력 등에 개입된 연구자와 연구 대상과의 관계, 연구자와 연구자가 몸담고 있는 지식 커뮤니티, 전체 사회와의 권력 관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 글에는 각자 정치적 입장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감정이 다른 세 주체 — 피해 여성, 가해 남편, 나(연구자) — 의 이야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증언자의 이야기에 대한 나의 해석에는 여러 사회적 관계가 개입되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연구 대상자라는 용어 대신 증언자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 책의 연구 대상에는 연구자 자신도 포함되므로 연구자와 연구 대상 간의 구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 대상자 대신에 연구 참여자라는 말을 쓰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본다. 이 글은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연구자인 나의 시각에서 해석한 것이므로, 연구에 참여한 여성들이 본 연구에 기여한 공로와는 별개로 연구에 대한 책임을 공유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 같은 이유에서 그들은 연구 대상자나 연구 참여자라기보다 경험과 고통의 증언자이다.
증언자의 고통, 연구자의 고통
‘아내 폭력’은 성(sexuality)과 가족 생활 등 가장 은밀하고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곳에서 발생하는 폭력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연구자와 증언자 모두 불쾌감을 극복하지 않고는 직면하기 어렵다. … 증언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을 때, 나의 행위가 간접적 폭력과 무엇이 다른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이 애(딸)를 그렇게 (강간)했을 때 왜 헤어지지 않았나요?” / “제발 그 얘기는 묻지 마세요. 너무 기억하기 싫은데 얘기하려니까 장이 꼬이는 것 같고 …… (울면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위가 막 아파요. 가슴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너무 아파요”
‘불행한 사건을 잊어라’ 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한 치유 방법을 주문하는 것일 뿐이다. 실제적인 상처의 치유는 폭력당한 경험을 잊으려는 노력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재해석할 때 가능하며, 이때 그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생존자(survivor)가 된다.
물론 모든 여성 폭력의 희생자가 저절로 생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 폭력은 분명 정치적 사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이다. (개인의) 상처가 (정치적)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투쟁이 매개되어야 한다. 고통을 겪었다고 누구나 현자가 되는 것은 아니듯 희생자가 생존자가 되기 위해서는 치열하고 고통스런 자기 극복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 과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여성주의 연구 과정의 의미는, 이 과정에 연구자가 동참하며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자기 위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일 테이다.
하지만 폭력을 극복하는 과정이 폭력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면, 사람들은 그냥 그 상태에 머물러 할 것이다. 나는 피해 여성들의 ‘말하는(말해야 하는) 고통’을 지켜보면서, 사회를 현재 그대로 두려는 보수주의자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되었다. 인간 생활의 어두운 문제(악)를 ‘들추어내어’ 연구하고 개선하려는 노력 자체가 악은 아닐까, 악을 파고하는 것은 아닐까? 폭력 문제를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연구자인 나도 폭력에 연루되고 접촉함으로써 부정의(injustice)한 상황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증언자들의 고통은 청자(聽者)의 경험 밖에 있으므로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연구자, 여성 운동가는 그들의 고통을 타자화하기 쉽다. 이것이 바로 악이다.
청자는 화자(話者)의 고통을 정의(定義)할 수 없다. 고통은 개인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각이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언어로 표현/소통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는 모두 비유적인데, 마치 무엇 무엇과 같은(‘as if’) 직유이거나 은유(metaphor)의 형태를 띤다.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확실한 느낌이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해 듣는 것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청자가 화자의 경험을 믿을 수 없다는 점은, 말하는 자가 사회적 타자이거나 그의 고통이 정치적 금기일 때 더욱 극대화된다. 폭력을 당한 아내의 고통은 한국 사회 구조에서는 부정되어야 한다. ‘매 맞은’ 아내들이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들의 고통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가부장제 가족 제도의 효율적 작동을 위협한다. 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안식처 가족의 신화, 보호자 남성의 신화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 경험은 평등하지 않다.
피해 여성들은 ‘이런 얘기를 누가 믿겠냐?‘며 말하는 고통 못지않은 의심받는 고통을 호소했다. 나는 나대로 ‘이 이야기들을 쓴다면 사람들이 믿을까’를 걱정했다. … 여성의 경험을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제3자 혹은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여성의 경험이 있는 그대로 ‘객관성’, ‘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권력 구조의 산물이다. …
인간이 고통을 느끼고 표현하고 인정하고 공감하는 행위는 그 사회의 권력 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 기존의 많은 연구들이 ‘아내 폭력’이 사회적 문제임을 주장하기 위해 주로 심각성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은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려면 피해가 끔찍하고 심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정치학이다.
‘증언자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
'객관성’은 정치적인 문제다
연구 과정 중 나는 우연히 부부 모두를 인터뷰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내가 상대방과 인터뷰한 사실을 모른다.) ‘부부 싸움’은 양쪽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한다는 통념처럼 그들의 목소리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남편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다면 폭력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일탈’적인 주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아내는 ‘눈치 없고 싸가지 없는 여자’였다.
남편이 주장하는 아내의 ‘나쁜 행실’이 반드시 폭력으로 연결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인가는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에 달려 있다. ‘객관성’은 연구자인 내가 가해/피해자라는 상반된 입장의 연구 대상과 사회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성을 인식하여 그들의 진술을 판단, 분석, 개념화할 때 확보된다. 이미 내가 ‘아내 폭력’을 부부 싸움이 아니라 폭력으로, 집안일이 아니라 인류의 반을 억압하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보는 것 자체가 나의 가치관을 개입시킨 것이다. 나의 이러한 인식은 남성이 자신의 가치관을 ‘중립,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한국 사회 내부에서 배우고 형성된 사회적인 것이다. 인식자의 사회적 상황(social position)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지 않은 지식은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다.
무것을 본다는 것은 동시에 무엇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의 가치에 대한 정의는 ‘객관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가치 판단에 의한 선택의 문제를 함의하며, 그러한 선택의 원리에는 권력 관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내 폭력’은 여성 운동이 활발할수록, 사회적 대책이 마련될수록 증가하는 속성이 있다. 일반적인 사회 현상과는 달리 해결 노력이 활발할수록 문제가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아내 폭력’이 없었던 문제가 아니라 다만 보고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 운동의 활성화는 피해 여성들에게 자신의 피해 사실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각과 용기를 준다. 이처럼 ‘아내 폭력’은 특정한 관점(gender perspective)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사실’로 인지된다.
모든 여성주의 연구가 그러하지만 특히 ‘아내 폭력’ 연구의 ‘객관성’, ‘사실’의 확보는 여성과 남성의 권력 관계(gender politics)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래서 ‘객관성’의 문제는 곧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연구자의 조건은 연구자가 의식하든 안 하든 연구에 영향을 끼친다. 연구 대상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어떤 부분에 반응하는지 모르면 연구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연구자가 자기 자신을 알 때 연구자는 연구 대상과 맺는 관계가 투사인지, 계몽인지, 의식화인지, 혹은 전이인지 유도 질문인지 구별할 수 있다.
피해 여성들을 만나면서 다시 읽는 기존 연구들
나는 국내 선행 연구를 검토하면서 몇 가지 문제 의식을 품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가정 폭력이 사회 문제로 제기된 이래 수백 편이 넘는 ‘아내 폭력’ 연구물들이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구성 형식과 내용이 거의 같다는 점은 나에게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구체적인 문제 의식은 다음과 같다.
- 첫째, 기존 연구들이 피해 여성의 경험에 근거를 두지 않거나 혹은 경험에 근거하더라도 해석 틀이 여성 중심적이지 못해서 사회의 가부장적 통념을 별로 비판하지 못하는 ‘상식’적인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 둘째, 연구 과정의 윤리와 정치학의 문제로서 자료의 인용과 구성에 관한 것이다.
- 셋째, 연구 대상자에 대한 타자화, 희생자화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문제는 ‘아내 폭력’을 누구의 시각에서 볼 것인가라는 점에서 하나의 문제로 연결되어 있다. …
몇몇 연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폭력당한 아내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가족도 유지되어야 한다고 본다. 현재 가족 구조의 문제와 폭력 발생을 연결하지 못하는 것은, 연구자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가족 제도를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3장. 여성의 눈으로 보는 ‘아내 폭력’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인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권력 행동, 정치적 행동으로 파악할 때 폭력은 남성 지배의 핵심적인 영역이 된다.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초기 급진주의 페미니즘 고전에서는 폭력이 남성 지배의 중요한 영역이라고 보지 않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줄리엣 미첼, 케이트 밀렛, 실라 로보텀은 남성들이 이미 군대, 과학 기술, 정치 권력, 경제력 등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현대 서구 사회에서 굳이 폭력이라는 신체적 수단을 통제 기술로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권력은 사용을 통해 영속화된다. 권력 관계로서 성별 체제(가부장제)는 한번 완성된 상태에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실천되는 과정이다. … 근대 사회의 특징인 집단 학살(genocide)과 여성 살해(gynocide)는 남성 중심의 이성주의, 합리주의의 또 다른 결과였다. 다시 말해 폭력은 권력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 의식적인 인간 활동이자 계획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성적인 폭력이라고 간주되는 강간과 신체적인 폭력이라고 인식되는 아내 구타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 아니다. 실제 피해 여성들이 대부분 강간과 구타를 동시에 경험하거나, 결혼 전에는 강간으로 결혼 후에는 구타로(결혼 후 강간은 인정되지 않으므로) 단지 형태를 바꾸어 폭력을 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시선은 그 자체로 성애화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은 곧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되고 이는 성(차)별 제도의 산물이다.
여성 폭력은 성별 권력 관계의 일환으로서 시대와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모두 가부장제의 보편적인 여성 통제라는 점에서 같다. 그러므로 ‘아내 폭력’은 가정 폭력의 한 종류라기보다는 강간, 성매매, 포르노, 음란 전화, 성기 노출, 성희롱, 근친 상간, 마녀 사냥, 신부 화장, 아내 순사, 음핵 절개, 전족 같은 여성에 대한 폭력의 한 형태이다.
1980년대 들어 서구에서 여성 폭력에 대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입장은 여성들 간의 차이와 여성의 행위 주체성을 무시하는 ‘결정론’이라고 비판받기 시작했다. 그러한 비판의 주요 내용은 여성들 간의 다름에 관한 것이었다. 즉 여성은 계급·인종·지역·종족·문화·성 정체성·장애/비장애·나이에 따라 개인이 가진 자원과 부(富)에서 차이가 있으며 이에 따라 폭력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 위와 같은 문제 제기는 충분히 타당하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성별 관계에 의한 권력과 통제의 문제로 제기한 것은 기존의 정치학과 권력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일 뿐 아니라 특히 ‘아내 폭력’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내 폭력’은 특별히 더 오랫동안 ‘집안일, 개인적인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내 폭력’이 시대와 지역을 넘어 보편적으로 발생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 폭력은 보편적으로 발생하지만, 동시에 역사성을 지닌다.
‘아내 폭력’은 명백히 성별화된 폭력인데도 성별의 문제는 가장 쉽게 간과된다. 가정 폭력적 접근 방식은 왜 언제나 때리는 사람은 ‘남성’이고 맞는 사람은 ‘여성’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남편이 스트레스 때문에 때린다면 왜 직장 상사나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은 안 때리는지, 술 때문에 때린다면 왜 아내들은 술을 먹어도 남편을 때리지 않는지, 분노 처리 기술이 미숙하기 때문이라면 왜 그 분노를 언제나 ‘집안에서만’ 표출하는지, 폭력 행위가 손실(형사상 제재, 이혼)보다 보상(분노 발산, 타인을 통제)이 크기 때문에 사용된다면 왜 여성들은 이 방법을 쓰지 않는지, 종교와 성격 차이 같은 부부 갈등 때문에 때린다면 왜 남성들은 이혼한 이후에도 전 부인을 때리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내 폭력’에 대한 질문은 (안 때릴 수도 있는데) ‘왜 때리는가’보다는,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로 전환되어야 한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적’ 공간, 가정
존 로크가 권위는 개인으로부터 나온다고 개념화한 것은 근대 국민국가 성립에 매우 중요한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근대적 인권 개념은 가부장제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고 공/사 영역 분리는 여성을 개인의 위치로 승격시키는 것과 가부장제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전략이었다. 가족을 사회로부터 제외해서 사적(私的)인 영역으로 만들므로써, 남성 가장은 사회에서 가족의 이해를 대표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말은, 여성이 생활하고 있는 가족은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 … 직장과 가정에서 성별 분업은 성별 권력 관계의 다른 표현으로서 이는 평등한 분업이 아니라 남성을 중심으로 한 여성의 배치이다. 여비서는 사무실의 아내(office wife)이고 아내는 집에 고용된 노동자다.(Bard & Morgan 1993, p230)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보다 ‘누구의 아내’일 때 정상성을 획득하고 더 많은 자원을 갖게 된다.
결혼이라는 폭력 허가증
가족은 여성을 이성 간의 일부일처제에 묶어 두고 여성의 성을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적절한 피학적인 것으로 재구성하는 가부장제 유지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 도구이다.
가부장제 사회의 주체로서 여성과 남성은 모두 가족 내에서 자신의 성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을 유지하려 하며, 또 (남녀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로부터 권력을 얻는다. 특히 여성은 성별 분업 원리에 따라 가족 내 지위가 곧 사회에서의 지위가 되기 때문에, 피해 여성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아내/어머니로서 성 역할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게 된다. ‘아내 폭력’은 아내가 폭력을 유발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성 역할에 충실하고 집착함으로써 지속된다. ‘아내 폭력’은 가부장제의 기본 성격과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에 성매매(매매춘)와 더불어 가부장제 프로젝트의 최후 보루가 되고 있다.
4장. 폭력 남편이 인식하는 아내 폭력
남성들은 가정이 휴식처이므로 마음대로 분노를 발산할 수 있고 아내는 조건 없이 수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남편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는 아내의 자기 감정 표현은 폭력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
결혼 생활을 구성하는 부부 간의 성, 여성의 부살핌 노동과 가사 노동, 남성의 임금 노동, 가정의 대표자로서 남성 가장 등 가족 생활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사회에 확산되어(‘가정은 사회의 기본적 단위’) 사회적 성별 관계 전반을 규정한다. 이처럼 결혼과 가족은 각 개인들에게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을 확고하게 부여하는 핵심적인 사회 장치이자 성별 관계를 생산하는 공장(gender factory)과 같다(Lorber 1994, p196).
여기서는 가족 제도 안에서 아내와 남편의 역할 규범이 ‘맞을 짓이 있다’는 문화적 전제를 어떻게 생산하고 지속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내를 때려서 가르칠 ‘권리와 의무’
근대 이후 가부장제 사회가 고수하고자 하는 친밀성의 상징으로서 가족의 이미지와 ‘아내 폭력’의 실상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아내 폭력’은 가족의 어두운 측면으로 간주되어 왔다. ‘아내 폭력’이 비정상적인 부부 관계에서만 일어날 것이라는 통념은, 폭력 남편이 ‘아픈 사람’(정신병자)이거나 ‘나쁜 사람’(성격 파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혹은 그들이 아프지도 아쁘지도 않다면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행위자의 어떠한 의지, 관리, 통제 조절을 거치지 않은 남성 생리학으로서 자연적인 행위(‘공격적 본능의 분출’)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담론의 결과로 남편의 폭력은 지나치게 이해되어 온 반면 아내의 대응은 지나치게 비난받아 왔다.
폭력 남편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아내들은 남편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별문제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응하기가 더 어렵다고 호소한다. 피해 여성들은 남편을 ‘아이큐가 높고 머리 회전이 빠르다, 치밀하다, 주도면밀하다, 논리 정연하다, 형사 출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행동과 판단력이 빠르고 예민하다, 잔머리가 천재다, 자존심과 자제력이 뛰어나다, 차분하고 생각이 많다, 집념이 강한 엘리트, 지적(知的)이다, 용의주도하다, 인격적이고 부드러운 사람, 매사에 계획적이고 꼼꼼하다’고 표현했다. 이는 폭력 남편들이 참을성이 없고 충동적이며 자기 통제력이 부족하고 스트레스 관리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는 기존의 ‘아내 폭력’ 연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기존 연구들이 이미 전제한 시각에 따라 자료를 구성하기 때문에 폭력 남편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남편은 폭력 행사를 통해 자신의 가족 내 성별 정체성을 확인하고 강화한다. 이 같은 폭력 인식은 그들의 가족관에서 나온다. “나는 남자의 권위가 조금 서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가장의 권위는 설 수 있는 거예요. 세상이 평등해져서 권위가 없어지면 안 돼요. 어린애가 잘못하는데 그냥 넘어가는 건 말이 안 되죠. 집안이 서려면 주춧돌이 있고 그래야 기둥이 서죠. 그 집안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집을 대표하는 대표자, 대변자가 있어야지. 배에도 선장이 있고 차도 운전을 해야 가잖아요. (48세, 대졸, 무직 폭력 남편)”
폭력 남편은 자신의 권리 의식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아내에 대한 폭력을 넘어 의무 차원으로 승화된다. 아래 사례의 남편은 자신이 그러한 의무(폭력)를 소홀히 했음을 자책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119에 실려 갔는데 글쎄 시누이랑 남편이 병원 와서 하는 말이, ‘오빠도 잘못했다. 오빠 잘못이 크다’는 거예요. 남편도 인정하면서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잘못이 있다. 내가 언니를 너무 풀어줬다’는 거예요. (36세, 고졸, 주부, 여성)”
이 남편이 반성하는 이유는 부인에게 서른다섯 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혔기 때문이 아니라, 부인의 외출을 허락하여 ‘감시와 감금’이라는 남편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손보다’는 무엇을 고치다(correct), 바로잡다, 폭력을 가한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아내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랠 손보는 것, 곧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의 잘못을 교육하기 위한 남편의 역할(폭력)은 가사 노동, 아내의 성적 서비스, 가정 주도권 등 가족 생활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가사 노동자로서 불성실한 아내:
가사 노동은 반드시 여성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사 노동과 비슷한 성격의 일을 가정이나 직장에서 남성이 하는 것은 남성성의 수치이자 훼손으로 여겨진다. 남성들이 결혼하는 가장 실질적인 이유 중 하나는 가사 노동 담당자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날은 남편이 잔뜩 술을 먹고 들어와서는 부엌으로 갔어요. 술을 마셨으니 목이 마르잖아요? 그럼 물을 먹고 (컵의) 나머지 물을 방바닥에 천천히 쏟아 버리는 거예요. 그때 내가 즉시 물을 안 닦는다고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어요. 저는 닦으려고 했어요. 정말로요. 근데 막 때리니까 닦으려 해도 정신이 없잖아요? (40대, 대졸, 자영업, 여성)”
… 가사 노동과 관련한 아내의 역할이 남편에 의해 이중 구속 메시지(double bind message)가 되어 폭력이 진행되는 경우다. 사실 이 같은 이유는 제3자가 볼 때는 어이가 없지만 아내와 남편 모두에게 설득력을 발휘한다. 사례 여성들은 모두 그러한 남편의 요구를 즉각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남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누가 옳은지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라’ 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다.
남편이 돈을 안 벌어오는 것처럼 가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아내는 남편을 때리거나 남편의 행동을 자신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 아내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남편 기 살리기 운동’과 같이 남편을 위로하는 것이다.
남편의 재산인 아내의 성:
대부분의 아내들에게 남편의 폭력과 성관계는 별로 구분되지 않는다. 서울시 거주 1,500명 중 92.7퍼센트가 아내가 남편의 기분에 맞추어 ‘성행위’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기혼 여성의 25.2퍼센트가 아내 강간을 당한 경험이 있고 이중 8.7퍼센트는 강간 직전 남편에게 구타당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1998, p22)
가장의 가정 경영권에 도전하는 아내:
가사 노동과 가정사(가정을 다스린다는 뜻)는 다른 일이다. 가사 ‘노동’은 아내의 일이지만, 가정의 경영과 관리는 집안 통솔권의 영역이므로 남편의 몫이다. … ‘진정한 가정’은 남성이 존재하는, 남성에 의해 질서가 잡힌 가정이다. 폭력 남편들은 가정을 자신들이 소유한 사업체와 같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거기에 단지 소속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아내가 재산권을 주장하거나 ‘이재를 밝히는 것’은 ‘섬뜩’할 정도로 공포스러워 한다.
아내와 남편을 묶어주는 폭력
남성 폭력의 오랜 역사는 폭력을 남성의 정체성과 인성(personality)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게 하였다. 남편의 역할로서 행해지는 아내에 대한 폭력은 가족 내에서 남편의 기능, 태도, 행동, 성격 특성을 표현한다. 남편의 성 역할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성 역할로서 폭력은 아내와 관계 맺는 방법이자 내용이 된다. … 이들에게 가정은 폭력을 통해서만 유지되기 때문에 폭력을 못 쓰게 하는 가정폭력방지법은 곧 ‘가정 파괴법’이다.
성 역할 구분은 ‘사소한’ 폭력에서 범죄로 명명될 수 있는 극단적인 폭력에까지 모두 작동한다. ‘부부 싸움’이나 가부장적 테러리즘은 결국 같은 사회 구조와 논리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는 ‘아내 폭력’이 부부 관계의 극단적, 예외적,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일상적인 ‘정상’ 규범임을 말해준다. … 현재의 가족 제도에서 ‘맞을 짓’은 남녀의 역할 규범과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5장. 폭력을 수용하는 아내의 심리
가정은 사랑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인식은 폭력을 은폐하고, 반대로 폭력 가정에 사랑은 없고 갈등과 증오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곳에 머물고 있는 피해 여성을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폭력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게 하는 다양한 문화적 구조들을 생산해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교 의례, 민족 문화, 전통, 놀이 따위로 정상화, 합리화, 일상 문화화되었다. 이는 여성 폭ㄹ혁을 은폐하고 해결을 지체시켜 온 사회 구조로 작용해 왔고 특히 ‘아내 폭력’은 가족 내에서 발생한다는 점 때문에 수천 년 동안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남편의 착취에 맞서지 못하는 이유
‘아내 폭력’ 원인에 대한 설명 중 교환 이론(exchange view)은 남성이 폭력을 통해 얻는 것이 있다고 보는 점에서 여성주의 관점과 비슷하다. 하지만 왜 여성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가 하는 점에서 교환 이론은 성 중립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남성들은 단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한다. 결국 폭력은 남성에게만 교환 수단이 된다. 원래 교환은 평등하고 상호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강제적 통제인 폭력은 착취 수단이지 교환 수단이라고 볼 수 없다.
사례의 폭력 남편들은 자신의 남자다움을 위해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돈을 벌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본 연구의 50사례 49명의 남편 중 약 40퍼센트인 19사례가 무직이었다. 직업이 있다 해도 부인과 함께 자영업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아내 혼자 일했다. … 남편의 생계 수단인 폭력이 착취를 넘어 피해자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가 되면 아내들은 도망친다. 그리고 그때서야 남편은 노동하기 시작한다. … 위 사례의 아내들은 경제력이 없어서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경제력 때문에 남편에게 잡혀 있다. 이들은 ‘가족 유지를 통한 여성 보호’라는 담론 아래 폭력과 착취 상태에 방치되어 있다.
폭력을 사소한 문제로 만들기
아내가 가족을 떠나지 않으면서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폭력을 견뎌내려면 자신이 당하는 폭력을 남들과 비교해서 끊임없이 상대화, 사소화(trivialization)해야 한다.
폭력, 사랑이거나 질병이거나 수치
격렬한 로맨스: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성 간의 사랑과 폭력은 단절적, 배타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남녀 관계의 연속선상의 양끝에 있다. 남녀 간의 사랑에는 폭력이 포함되며 남녀 간의 폭력에는 사랑의 요소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남녀 간의 사랑은 폭력을 통해 더욱 극적이게 되는데, 이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녀 간의 힘이 불균등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폭력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의미이다.
질병:
남편의 폭력을 질병으로 보는 관점은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다. 사회는 가정에서 일어난 폭력을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간주함으로써 가족 자체가 문제화되는 것을 꺼린다. ‘아내 폭력’의 원인을 남편의 강박적 신경증, 편집증 (paranoid)을 넘어 뇌의 질병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았다. 지금도 일부 신경학자들은 뇌 질환과 폭력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편의 ‘아내 폭력’을 범죄로서 처벌해야 한다기보다는, 병으로서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행 가정폭력방지법의 내용에도 치료적 관점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다. 폭력당하는 아내는 남편의 폭력을 질병으로 간주함으로써 폭력을 견디는 근거를 만든다. 혹은 남편이 너무 ‘희한하고 변태적인’ 폭력을 휘두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의 범위를 넘는다는 측면, 즉 상식적인 가족 관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병이라고 생각한다. 전자는 폭력을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료의 문제로 간주함으로써 ‘병은 고칠 수 있으므로 낫기를 기대’하는 것이고, 후자의 병의 의미는 신체 활동으로서 ‘자연적’ 현상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아내의 노력)으로는 통제 불가능하다는 좌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건 아내들이 생각하는 남편의 질병은 대개 ‘미쳤다’는 의미에서 ‘정신병’이다.
남편과 가족의 수치:
오랫동안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남성들 간의 범죄로 간주되어 왔다.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는 그 여성이 소속(소유)된 남성이나 가족, 공동체,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서 남성의 ‘재산권’ 침해를 의미했다. 아내가 다른 남성과 간통했거나 강간당한 것은 남편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것은 명예를 지키는 것(defence of honor)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관점은 동물에 대한 “간접 의무” 관점과 같다. 동물을 학대하는 건 동물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동물의 ‘주인’에 대한 재산권 침해라는 관점. 동물의 권리, 인간의 잘못: 도덕철학 입문 참고)
‘맞을 짓’의 결과
피해 여성들이 ‘내 잘못으로 인해 맞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통을 견딜 만한 가장 합당한 이유가 된다. 폭력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으면 원인 제거도 자신이 할 수 있기 때문에, 피해 아내는 남편의 폭력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6장. 아내 정체성과 가족 정치학
자신은 맞을지라도 자녀를 위해서 폭력을 견뎌야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한 ‘인간’으로서 여성과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최소한 맞지 않고 살 권리가 있지만 여성이 ‘어머니’가 될 때 그 권리는 당연히 유보되고 포기된다.
아내 역할로 재생상되는 폭력의 구조
완벽한 아내 되기
가족 내 여성의 역할과 남성의 역할은 개인의 의지로 쉽게 상호 교환되거나 대치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호혜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불평등하다. 피해 여성이 아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 할수록 자신의 자원이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아내가 힘을 잃는 만큼 남편은 힘을 얻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다. 아내가 완벽하게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이후 남편이 아내에게 더 쉽게 권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남편 변화의 책임자. 피해자가 해결사로
폭력당하는 아내들은 남편의 폭력을 고쳐보고자 온갖 노력을 다해보다가 정작 자신의 건강과 자신감과 지지망을 다 잃은 후에야 여성 단체 등에 사회적 개입을 요청한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아내가 가정 생활의 책임자로서 폭력을 포함하여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해결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 혹은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은 남자이고 그 남자를 지배하는 사람은 여자’ 따위의 사회적 언설은, ‘여자의 할 일은 남자를 만드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남성(성)의 형성은 상대 성인 여성의 복종과 배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여성은 아이에게 젖을 주듯 남성에게 자아를 키워주고 그들의 상처와 분노를 어루만져주어야 한다. 이렇게 여성이 남성을 만드는 과정이 감정 노동, 보살핌 노동이다. 여성은 비난의 말, 자존심 상하게 하는 말, 무관심 등으로 남성성을 거세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남성을 강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남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모든 책임은 여성에게 있다.
성애화된 보살핌 노동을 통한 폭력 조절
폭력 남편에게는 구타 후 아내를 강간하는 것은 ‘부부 싸움 후 화해’를 의미한다. 폭력 남편은 성(sexuality)을 이용하여 자신의 폭력을 폭력이 아닌 정상적인 부부 생활의 일부로 만든다. …
“남편은 ‘내가 너를 때린 것은 미워서가 아니다’ 하면서 그걸(섹스)로 화해했다고 생각해요. 남편은 그 순간을 조용히 넘어가기 위해, 애들 앞에서 부부가 싸운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강제로 그걸 해요. 나는 나대로 새끼들 앞에서 아빠가 엄마를 때릴 때는 내 생각에 ‘엄마가 얼마나 잘못했으면 맞을까’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할까 봐 (구타 후 강간을) 참지요. (40세, 국졸, 자영업, 여성)“
왜 폭력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가
인간의 권리가 어머니의 도리로
자녀 문제는 아내가 상황 변화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다. 남편이 자녀를 함께 구타하는 경우도 있고, 자녀는 구타하지 않다가 아내가 집을 나갔을 때 자녀를 볼모로 삼아 폭력을 가함으로써 아내를 돌아오게 한다. 아내가 자녀와 함께 탈출에 성공했더라도 자녀가 학령기에 있을 경우 학교를 추적해서 남편이 찾아오기 때문에 당분간 학교 교육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 이처럼 자녀 양육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은 여성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폭력 가정에 머물게 한다.
(동물학대 이해하기: 사회학적 분석에 따르면 반려 동물도 유사한 작용을 한다.)
아내의 지위를 위협하는 남편의 외도
남편의 폭력은 아내가 참는 이상 가정을 깨는 사건이 아니지만 외도는 가정을 해체할 수 있다. 성별 분업 사회에서 남편의 외도는 아내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아내는 폭력보다 외도에 더 큰 충격과 상처를 받는다. 외도는 남편의 사랑과 자원이, 그리고 가족 자체가 다른 여성에게로 이동함을 의미한다. … 폭력은 아내의 지위를 위협한다.
아내라는 직업. 경제적 주체의 거부와 박탈
여성은 아내의 지위에 매달릴수록 경제 주체로서 사회적 시민이 되기 어렵다. 성별 노동 분업이 강하게 관철되는 사회에서 노동자로서 여성과 아내로서의 여성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포와 저항의 가족 정치학
아내의 몸에 체현된 공포
폭력다한 아내들의 공포심은 원래 외상후스트레스장애라는 용어가 맞지만 이 글에서는 그냥 일상 용어로 공포라고 쓰겠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같은 인간의 경험 영역을 벗어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을 말한다. 공포와 달리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원인은 사건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폭력당하는 아내는 이중의 공포를 경험한다. ‘아내 폭력’은 반복해서 진행되므로 아내는 이후의 폭력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어서 두렵고, 모든 폭력은 임의적이므로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해 두렵다. 아내의 공포심은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폭력 허용 규범의 성별성. ‘가해자’가 된 아내
남편이 폭력을 행사할 때 아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대응한다. 무조건 빌기도 하고 도망가거나 소리 지르기, 꼬집기, 할퀴기와 같은 ‘여성적’인 방법으로 맞선다. 그러나 아내의 방어는 종종 ‘공격’으로 의미화된다. 이 논의는 ‘아내 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될 때 언제나 동반되는 담론인 ‘매 맞는 남편’의 존재와 연결된다.
(이 현상은 인종차별에서도 마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Endangered/endangering: schematic racism and white paranoia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경찰들에 의한 로드니 킹 집단 구타 장면을 담은 영상이 법정에서 어떻게 경찰들에 대한 로드니 킹의 폭력으로 해석되는지 분석한다.)
가족 유지 책임의 성별성. ‘가정 파괴범’이 된 아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내 폭력’이 일탈이 아니라 규범(‘정상적’)이라는 의미는, 남편의 폭력이 규범을 위한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저항 행위가 규범을 위반한다는 것을 뜻한다.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의 저항, 특히 폭력을 피해 집을 나가거나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일이다.
사적화(privatization)되는 ‘안식처’에서의 폭력
경찰처럼 주로 남성들로 구성되는 공적 기관들은 ‘집안일’(아내 폭력)에 ‘간섭’(처벌)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논리인 ‘사생활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가족을 법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얘기는 곧 ‘남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없다’, ‘남편의 폭력 행위를 보호하겠다’는 뜻이다. …
“여러 번 신고했죠. 순경 말이, ‘글쎄요, 아줌마 말하는 게 깝깝한데, 아저씨가 술 먹고 좀 시끄러울 수도 있지. 그런 걸로 파출소에 신고하면 대한민국에서 안 잡혀 올 남자들 없어요’ 그러는 거예요. 내가 어이없어 하니까, ‘정 그러면 한 번 더 맞고 오세요. 병원 실려 갈 정도로 눈에 피가 철철 나면 오세요’ … (30세, 고졸, 자영업, 여성)“
7장. 가족 중심 관점에서 여성 인권 관점으로
한국 사회에서 인권은 관념적으로는 긍정적, 진보적 가치로 간주되지만, 여성 인권처럼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한국 사회의 주류 가치인 가족주의와 경합할 때는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 글에서 나는 ‘아내 폭력’의 원인과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하기보다는 폭력당하는 아내의 가족 내 성별 정체성을 문제화함으로써, ‘아내 폭력’ 문제를 인권의 시각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한국 사회에서 ‘아내 폭력’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 글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