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에 대한 생각

  • 2025-08-31
  • 저자: AK

블록체인은 신뢰할 이유가 없는 주체들 사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 교환을 할 수 있게 한 최초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투기와 사기 수단으로 주로 쓰이고 있지만 잠재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기술이다.

블록체인에 대한 내 관심

이런저런 계기가 있어서 소소하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간접적인 계기들:

  • 2000년, 2001년: 기밀 문서를 암호화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덕분에 암호학의 아주 기초적인 내용을 공부했다. 물론 정수론 등 배경이 되는 지식이 턱없이 부족해서 깊게 이해하지는 못했고, 만들어진 알고리즘을 목적에 맞게 주워다 쓸 수 있는 정도로만 공부를 했다.
  • 1999년, 2000년: P2P 기술이 유행하면서(Napster, 소리바다, SETI@Home) 나도 관련 기술을 공부하며 이런저런 원대한(?) 상상을 했더랬다. 당시에 peer discovery 문제를 어떻게 남들보다 잘 해결할지를 고민했었는데 딱히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 2001년: 전자화폐 소액결제 솔루션을 설계 및 개발했다. 일정금액을 포인트 형태로 충전한 뒤 1원 단위로 쓰는 방식. 은행이나 카드사에 의존하지 않고 거래수수료 없이 원클릭으로 과금이나 송금을 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며 기대에 부풀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중앙 서버가 있었으니 비트코인과 달리 기술적으로 특별할 것은 없는 프로젝트였다.

2008년에는 비트코인 백서(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가 공개됐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 비트코인이라는 게 있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접하기는 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는 못했고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참 뒤에 직접적인 계기가 생겼는데, 2022년 당시에 일하고 있었던 한 회사가 블록체인 사업에 깊게 관여하게 되어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 비트코인 백서를 읽고(의외로 짧았다) 이더리움을 공부하고 비탈리크 부테린의 글들을 이것저것 읽었다. 모든 내용을 깊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앞에서 언급한 간접적인 계기들(암호학, P2P, 전자화폐 소액결제) 덕분에 큰 틀에서는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블록체인의 가치

사기치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블록체인에 대한 악명과 원한과 무용론이 쌓여가지만, 나는 블록체인이 분명히 전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 기술이라고 생각하다.

블록체인의 본질적인 가치는 신뢰할 이유가 없는 주체들 사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 교환이 처음으로 가능해졌다는 점(이하 무신뢰 정보교환)이고 그걸 가능하게 한 핵심적인 기술 요소는 합의 메커니즘이다.

git은 연결된 커밋의 묶음이고, 머클트리 구조를 사용하여 무결성이 보장되며 중앙화된 서버가 없다는 점에서 git은 블록체인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인터넷에서 읽었는데, git에는 합의 메커니즘이 빠져있고 무신뢰 정보교환을 지원하지 않으므로 git이 블록체인이라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git과 블록체인은 동일한 기술 요소들을 일부 공유할 뿐이다.

블록체인 오용

무신뢰 정보교환이 필요 없는 상황에서 블록체인을 쓰는 건 기술 오용이다.

블록체인에 가치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상당수의 블록체인 응용이 무신뢰 정보교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 쓰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블록체인 오용이 이토록 많은 이유는, 사람들이 뭘 몰라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뭘 모른다기에는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한 똑똑한 사람들이 “코인판”에 너무나 많다. 여기에서 “코인판”이란 코인 또는 블록체인으로 사업을 하는 이들을 말한다.

블록체인 아닌 걸 블록체인이라 부르기

블록체인이 필요 없는 곳에 블록체인을 쓰는 오용도 문제지만, 블록체인이 아닌걸 블록체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문제다.

예를 들어 합의 메커니즘으로 권위 증명(PoA)을 채택한 시스템은 블록체인의 본질을 상당히 훼손한다. 권위 증명 방식은 검증 노드의 익명성을 포기하고 검증 노드를 운영하는 주체가 오프라인의 특정 기업 또는 개인임을 명시하여 “내가 이렇게 유명하고 큰 기업인데 사기를 치겠어?”라고 호소하는 방식이다. 애초에 오프라인에 쌓아둔 신뢰 및 법적 계약에 의존할거면 뭐하러 블록체인을 쓰나?

게다가 내가 접했던 사례에서는 귄위 증명 방식을 쓰면서 모든 검증 노드를 단일 기업이 운영/관리한다. 이러면 더이상 블록체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본다. 이 시스템이 구현한 것은 분산 합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참여 업체들 사이에서의 분산 수수료 징수 메커니즘에 불과하다.

PoA를 채택한 프라이빗 체인 종류의 시스템은 굳이 좋게 말하자면 “다른 종류의 분산원장기술” 정도로 볼 수 있겠으나, 해당 업체의 설계는 좋게 봐줄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전망

블록체인으로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이나 코인을 투기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면, 그때 비로소 블록체인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말 많고 탈 많은 NFT에도 분명한 가치(개념적 희소성에 대한 무신뢰 보증)가 있다고 믿는다. 다만 사기꾼들이 그 가치를 적극적으로 훼손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