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UI 디자인 종말론

  • 2025-05-03 (modified: 2025-05-04)

HCI 또는 UI 분야에는 더이상 새로울 게 없다는 주장을 한 15년 전부터 종종 들어 왔는데 요즘은 점점 더 자주 들린다. LLM API에 UI만 살짝 씌운 소위 “thin AI wrapper” 제품은 경쟁력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VC들이 최근 몇 년 동안 떠들던 소리다. AI 시대가 왔으니 이제 UI 디자이너 및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필요 없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세 가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AI는 못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영원히 있을거라는 진부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HCI/UI에는 이제 새로울 게 없다는 주장

현재의 GUI 패러다임은 1970년대에 정립되었다. 50년이 넘게 지났지만 제품 및 서비스의 인터페이스는 여전히 이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다. 물론 SIGCHI 등 여러 학회에서 매년 쏟아져 나오는 연구를 보면 다양한 시도들이 꾸준히 있어 왔지만,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WIMP 패러다임

1974년, Xerox PARC에 “응용정보처리심리학(Applied Information Processing Psychology)“이라는 작은 프로젝트 그룹이 생겼고 이들의 연구는 WIMP(“Windows, Icons, Menus, Pointer”의 줄임말. 창과 아이콘과 메뉴가 있고 이걸 마우스 등 포인팅 장치로 조작하는 방식) 패러다임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 그룹에서의 연구를 정리한 책이 1983년에 출판된 인간-컴퓨터 인터랙션의 심리학이다.

당시의 상황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 이들의 연구는 당시의 최신 심리학 이론인 인지심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당시는 인지 혁명(1950년대)으로부터 2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고 신생 학문인 인지심리학은 소위 “정보처리 모델”에 경도된 상황이었다.
  • 이들이 연구하던 당시의 컴퓨터는 대단히 조악한 수준이었으며 책상 위에 올려놓고 쓰는 “데스크탑”이 가장 작은 형태의 컴퓨터였다. 무릎 위에 올려놓고 쓰는 “랩탑”은 70년대 초반에는 상상 속 기계(예: 앨런 케이Dynabook)였고 80년대 초반에서야 서서히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현재의 상황

하지만 50년이 흐르는 사이에 인간에 대한 연구도 발전했고 컴퓨터도 발전했다.

  • 1970년대에 학계에서는 제임스 깁슨생태주의 심리학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체화된 인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통적 계산주의 관점의 인간 정보처리 모델인 “지각-정보처리-실행” 단계로는 실제 인간의 행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자명해졌다.
  • 컴퓨터도 놀랍도록 발전해서 들고 다니는 컴퓨터(PDA 및 스마트 폰), 입는 컴퓨터(스마트 시계 등),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디바이스(메타 퀘스트나 애플 비전 프로 등)가 폭넓게 상용화되었다.
  • 2013년 구글의 word2vec 즈음부터 갑자기 자연어처리 분야가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했고 2022년에는 드디어 ChatGPT가 출시된다. ChatGPT는 출시된지 딱 4일 만에 100만명의 사용자를 확보하는 기록을 세운다. 이제 컴퓨터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처럼” 상호작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성능은 매우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체화된 인지와 LLM 사이에는 인공신경망 또는 연결주의라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 크게 발전했고 컴퓨터의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모두 크게 발전했는데 인간과 컴퓨터 사이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및 인터랙션에 대해 새롭게 할 얘기가 없다는 건 말이 안된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할 적시이다.

UI만 씌운 제품은 경쟁력이 없다는 주장

UI만 살짝 덧씌운 제품은 경쟁력이 없다고들 말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OpenAI API를 호출하거나 Llama 같은 공개 모델(open-weight model)을 가져다가 UI만 살짝 입힌 “thin AI wrapper”를 비판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좋은 포장엔 큰 가치가 있다

하지만 비판의 방점은 “wrapper”가 아닌 “thin”에 찍혀야 한다. 그러니까, 포장만 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포장을 “너무 얇게” 했다는 걸 지적해야 한다.

인터페이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인터페이스를 “포장”이라고 부르며 평가절하하곤 하는데, 포장은 중요하다. 그리고 좋은 인터페이스는 “얇은” 포장이 아니다. 인터페이스의 차이가 제품의 핵심 경쟁력이었던 사례는 무수히 많으며, 그 제품의 알맹이에 AI가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AI 기반의 서비스”라는 말보다는 “AI가 가미된 서비스”라는 말을 좋아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AI이 과몰입한 나머지 AI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요소를 하찮게 보게 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제품을 만드는 관점에서 보면 AI는 그저 재료 중 하나일 뿐이다. 비교적 최근에 나왔고 기존에 못하던 걸 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재료인 것은 맞지만 AI가 아닌 나머지가 다 사소해지는 건 아니다.

제품의 재료가 아닌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도와주는 역할로써의 AI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해보자. 사람들의 예측대로 생성 AI 덕분에 소프트웨어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언제나처럼 더 배우기 쉽고, 더 쓰기 쉽고, 더 쓰기 즐거운 제품을 찾게 될 것이다. “좋은 UI”는 언제나처럼 제품/서비스의 핵심 경쟁력으로 남게 된다.

채팅 인터페이스만 있으면 뭐든 다 될까?

혹자는 이제 뭐든지 자연어로 대화만 하면 되니까 기존의 UI는 모두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잘못된 주장이다. ChatGPT의 대유행으로 인해 사람들은 “AI”라고 하면 “챗봇”만 떠올리지만, 자연어 기반 대화(그게 텍스트 기반이건 음성 기반이건 간에)는 일부 맥락에서만 편리한 방식일 뿐 모든 상황에 쓰이기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정밀한 지시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자연어만으로 소통하는 방식은 극도로 효율이 낮아진다. 말로만 정밀한 디자인을 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좌측 상단의 툴바에 있는 버튼 중 세번째 버튼의 아이콘을 빨간색으로 바꿔줘. 아니, 조금 더 진한 빨간색으로. 아니야 이건 너무 어두워.” 이런 방식보다는 아이콘을 클릭한 뒤 “색상을 바꿔”라고 말하면 색상 선택 UI가 나타나는 방식이 훨씬 쉽고 간단하다. 작업의 정밀도가 높아질수록 자연어의 한계가 분명해진다.

AI 에이전트가 다 해줄테니 다른 인터페이스는 필요 없을까?

시시콜콜한 작업은 AI 에이전트가 대신 해줄테니 괜찮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어떤 종류의 작업은 “과정”을 내가 봐야만 한다. 예를 들어 많은 디자이너들은 “완결된 디자인”을 머리 속에 담아놓고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는게 아니라 디자인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의 완결성을 서서히 높여간다. 이런 종류의 작업에서 “과정”을 생략하는 건 불가능하다. 과정에 담긴 가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은 AI 에이전트에게 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시를 할 당시에는 결과물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스스로도 모르기 때문이다.

생성형 UI가 답인가?

또다른 이들은 그때그때 사용 맥락에 따라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생성형 UI를 비전으로 제시하지만 이 방식이 성공하려면 굉장히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참고로 그때그때 바뀌는 “적응형 UI” 실험은 과거부터 꾸준히 있어 왔지만 대부분이 실패했다. 왜냐하면 UI가 계속 바뀌면 사용자가 해당 UI에 대한 습관 형성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오히려 인지부하를 높이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좋은 UI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AI 시대에도 여전히 핵심 경쟁력이다.

UI 디자이너와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필요 없다는 주장

이제 코딩 에이전트가 UI를 대신 만들어주니까 UI 디자이너나 프론트엔드 개발자는 필요 없다는 주장도 자주 듣는다. 이런 주장은 다음과 같은 심상에 기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 소프트웨어 제작 공정은 일종의 생산 라인이다.
  • 원재료인 “사업 아이템”을 왼쪽 끝에 넣으면 오른쪽 끝에서 완제품인 소프트웨어가 나온다.
  • 생산 라인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 테스터가 있다.
  •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병목 자원이라서 완제품이 빨리 안나온다.
  •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AI로 대체하면 병목이 제거되어 완제품이 빨리 나온다.

디자인과 개발(특히 개발)이 언제나 병목이었다는 점에서 위 심상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지만 이 병목이 제거된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황을 보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 병목으로 인해 지금 세상에는 소프트웨어가 턱없이 부족하다. 세상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 그나마 존재하는 소프트웨어는 대단히 낙후되어 있고 심지어 야만적이다(접근성이나 보편 디자인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

결국 지금보다 훨씬 더 뛰어난 품질의 소프트웨어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은 새로운 UI 패러다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이고, 좋은 UI가 핵심 경쟁력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시기이다.

병목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인간이 아직 소프트웨어 개발의 복잡성을 잘 관리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소프트웨어 공학의 역사는 고작 40년 정도다). 특히 UI 분야의 복잡성은 대단히 큰 문제인데, 얼마냐 심각하냐하면 UI 디자인의 주요 주제들은 아직 공학적으로 다뤄지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무슨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조차 소프트웨어 공학의 틀 안에서는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소프트웨어는 극도로 타협한 상태로 세상에 출시되며, 그 결과로 주변화된 상황에 놓인 이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문제를 겪게 만드는 야만적인 상황이 확대재생산된다. 그러니까 소프트웨어로 돈은 벌어야겠는데 이 복잡한 문제를 다 풀 엄두는 나지 않으니(혹은 문제가 뭔지 인식조차 못하고 있으니) 일단 되는대로 만들어서 팔리는대로 파는 중이다. (참고: 디지털 디자인의 복잡성)

현재의 병목이 제거된 뒤 일어날 변화들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보면, UI 디자이너와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필요 없다는 생각은 단견인 것으로 보인다.

영원히 인간이 필요할까

지금까지의 내 주장은 “지금 인간이 하던 일을 AI가 대체하면 인간은 더 크고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게 된다”는 전제 하에 성립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더 크고 복잡한 문제”도 AI가 더 잘 풀 수 있다면?

나는 언젠가 그렇게 될거라고 믿는다. 어쩌면 생각보다 그 시기가 빠르게 올 수도 있다. 이미 AI가 과학 연구를 대신 수행하기 시작했고, 복잡한 추론을 요하는 수학 문제 풀이는 대부분의 인간보다 AI가 훨씬 잘하고 있다. 새로운 UI 패러다임을 찾아내는 일, 소프트웨어 개발의 복잡성을 관리할 방법을 찾아내는 일 등도 아마 AI가 잘할 수 있을거라고 본다.

다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사람이 필요하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낭만적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현실적으로는 필요하다는 얘기다.

내년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미래에 인간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모든 생산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오면, 그리고 그 세상이 분배 정의가 실현된 세상이라면, 인간은 소외된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각자의 가치를 지향하며 살면 되니까 그 또한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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