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쾌고감수성
동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으므로(권리론) 또는 동물도 고통을 느끼므로(결과주의) 육식을 지양하자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떨까? 식물도 고통을 느낄까?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면 채식도 하지 않아야 할까?
자극에 대한 반응 vs. 통각에 대한 의식 경험
식물도 생명이기 때문에 외부자극에 대하여 다양한 반응을 한다. 몇몇 반응은 매우 지능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극에 대한 반응이 곧 통각에 대한 의식 경험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식물의 끔찍한 비명?
한 연구에 따르면 몇몇 식물은 상황에 따라 초음파를 발생시키는데, 이 초음파는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감지할 수 있고 자극의 종류에 따라 음파에 구분 가능한 패턴 차이가 있다.
음파란 공기의 진동이고, 이 진동이 인간의 가청주파수 내에 있으면 ‘소리’, 주파수 밖에 있으면 ‘초음파’라고 부른다. 위 연구는 식물이 몇몇 상황에 따라 진동을 일으키고, 진동으로 인해 발생한 공기의 진동을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으며, 진동의 패턴을 통해 식물이 겪는 상황(가뭄, 훼손 등)을 구분할 수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구진들은 목질부(xylem; 물과 양분을 퍼올리는 조직) 내부에서 형성되는 기포가 터지며 진동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발생되는 초음파가 진화적 적응인지 여부는 밝혀진 바 없다. 만약 진화적 적응이라면 다른 곤충이나 동물들이 이 소리에 반응하도록 진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테면 해충이 있을 때 식물이 발생시키는 초음파를 다른 포식동물이 감지한다면, 식물은 포식동물을 이용하여 해충을 제거할 수 있어서 이롭고 포식동물은 식물을 이용하여 먹이를 찾을 수 있으니 서로에게 이롭다.
이런 내용의 연구를 소개하는 국내의 한 기사 제목은 “식물도 고통 느끼면 끔찍한 비명 지르는 것이 발견됐다”이다. “고통”, “끔찍한 비명” 등 원래의 연구와 무관한 표현들이 근거없이 쓰이고 있다. 비가 내리면 빗소리가 나지만 아무도 “빗방울이 추락하며 끔찍한 비명을 지른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대비된다.
식물이 “위험해! … 통증 신호를 만들어”낸다?
다른 연구는 애벌레 등에 의해 잎이 손상되는 경우 식물이 위험 신호를 보내서 방어 메커니즘을 발동시키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식물도 생명이므로 번식을 잘하는 방향으로 진화되었으니 위험에 대한 다양한 방어 메커니즘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 말이, 위험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고 통각을 느낀다는 말은 아니다. 즉, 자극에 대한 적응적 반응이 통각에 대한 의식 경험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연구를 소개하는 국내의 한 기사 제목은 “애벌레 공격에 ‘위험해!’… 식물, 통증 신호 만들어 잎에서 잎으로 전달” 이다. 물론 원래의 연구는 통증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근처에 있는 잎모양을 “보고” 따라하는 식물
한 식물종(Boquila trifoliolata)은 인근에 있는 다른 식물의 잎모양을 모방할 수 있다. 숙주 식물의 휘발성 화학물질에 반응한다는 가설, 숙주로부터의 수평적 유전자 이동 가설 등이 제시되었으나, 2022년의 한 연구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식물의 잎모양도 모방한다는 점을 밝혀지며 기존 가설들이 기각된다. 해당 연구에서는 해당 식물이 안점을 이용하여 인근 식물의 잎모양을 “보고” 모방한다는 가설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참고: 식물의 시각)
식물이 빛에 반응한다는 점(굴광성)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인근 식물의 잎모양을 모방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발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하지만 여전히, 정교한 진화적 적응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부터 식물이 의식적인 시각 경험을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식물은 절대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나
하지만 식물에겐 절대로 의식이 없고 식물이 고통을 느낄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식물의 모든 반응은 기계적 메커니즘의 결과일 뿐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위험하다.
18세기 철학자 데카르트는 인간만이 영혼을 가지며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동물은 복잡한 기계 장치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잔혹한 동물 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살아있는 개의 사지를 못으로 고정하고 해부를 했다고도 한다.
물론 식물은 동물과 달리 신경계가 없고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통각수용체도 없다. 하지만 새의 날개와 곤충의 날개처럼 진화적 계통이 다른 종 사이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여러 진화적 적응(상사 기관)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적응 문제를 풀기 위해 항상 동일한 진화적 해결책을 사용해야 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단순히 신경계나 통각수용체가 없으므로 통증을 느낄 수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동물의 경우에도 통각 신호와 통각 경험이 1:1로 대응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참고: 체성 감각 증폭) 더욱 그렇다.
식물은 움직이지 못한다는 단언에도 지나치게 동물 중심적인 면이 있다. 미모사처럼 만지면 잎을 빠르게 접으며 움츠리는 식물도 있고, 우리가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대부분의 식물들도 영상을 녹화한 뒤 빠르게 돌려보면 주변 환경을 탐색하고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뿌리 부근의 미생물을 통해 주변의 식물들과 활발히 신호를 주고 받기도 한다. 식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식물의 생명적 특징들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도 과거 데카르트가 동물에 대해 저지른 것과 동일한 오류를 식물에 대해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조금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난점
고통은 주관적 의식 경험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가 어떠한 의식 경험을 하는지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 이를 심리철학에서는 타자의 마음 문제라고 부른다. 인간은 식물이 고통을 느끼는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들을 통해 상대가 고통을 느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다른 존재가 나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의식 경험을 하는지 여부는 과학이 영원히 밝힐 수 없는 주제 중 하나다.
이러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식물이 고통을 느끼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시도는, “유비에 의한 추론”과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이다.
유비에 의한 추론은 “나는 이러저러한 특징을 지녔고 고통을 느낀다.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러저러한 특징을 지녔으니 아마 고통을 느낄 것이다”라는 형식을 띈다. 상대와 나 사이에 공유되는 “이러저러한 특징”이 많을수록 타당성이 높아진다.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은 “상대방은 이러이러한 상황에서 저러저러한 행동을 한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가설 중 가장 나은 가설은 상대방이 고통을 느낀다는 가설이다”라는 형식을 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경제성(가장 단순한 설명으로 현상을 가장 잘 기술할 수 있는 가설)이 높은 가설이 좋은 가설이다. 흔히 오캄의 면도날이라고 불린다.
유비에 의한 추론과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을 고려한다면, 고통 또는 의식 경험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다양한 특징들에 대하여, 인간 혹은 인간과 진화적으로 가까운 생물과 식물 사이에 어떠한 유사점 혹은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많은 특징들에서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면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보는 견해에 힘이 실린다. 반대로 거의 어떠한 특징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지 않으면 식물이 고통을 느낄 가능성이 낮다고 보아야 한다.
실증 연구: 식물과 닭의 비교
식물과 일부 척추동물, 다양한 무척추동물을 포함하는 총 18종 생물의 의식 경험과 관련된 특징들을 비교한 연구가 있다. 유해 자극에 대한 반응, 동기에 기반한 트레이드오프, 학습 관련 지표, 인지적 성숙도, 약물에 대한 반응, 항행 기술, 정서 상태 관련 행동, 해부학적/진화적 특징 등 여덟가지 범주에 대하여 총 53가지 특징을 조사한 연구다. (참고: Sentience table)
해당 연구에 따르면, 식물, 닭, 소를 비교했을 때 식물은 53가지 중 거의 모든 특징에 대해 닭과 큰 차이를 보이는 반면, 닭과 소는 차이에 비해 유사성이 더 컸다.
해당 연구에서는 “넓은 의미의 통각”과 “엄밀한 의미의 통각”을 구분하고 있다. 식물의 경우 넓은 의미의 통각을 느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약간 그러함lean yes”, 엄밀한 의미의 통각을 느낄 가능성에 대해서는 “매우 그렇지 않음likely no”이다. 넓은 의미의 통각이 “약간 그러함”인 이유는 식물들도 외부 자극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할 수 있다는 점(Plant perception) 때문이다. 몇몇 연구자들(Monica Gagliano 등)은 식물도 느낄 수 있다고 해석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견해에 부정적이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식물은 의식 경험과 관련된 거의 모든 특징에 대하여 반응이 없거나 알려진 바가 없다. 알려진 바가 없는 이유는 관련 연구가 없었던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식물이 “놀이 행동을 하는가”, “거울 테스트를 통과하는가” 같은 걸 연구하는 학자는 아직 없으니까.
서점에 가면 간혹 “식물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줬더니 더 잘 자라더라”, “물에게 좋은 말을 했더니 물의 성질이 달라지더라”는 식의 주장을 담은 책들이 보인다. 몇몇 책들은 대단한 과학적 근거가 있다는 식으로 광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별 과학적 근거가 없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식물도 생명이기 때문에 외부 자극에 대하여 다양한 방식의 반응을 한다. 하지만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고통에 대한 의식 경험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론적 제약(타자의 마음 문제)으로 인해 앞으로도 영원히 확고한 답을 알 수는 없겠지만, 위 연구에 따르면 식물이 고통에 대한 의식 경험을 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식물이 고통을 느끼면 육식을 지양할 이유가 사라지나
식물이 고통을 느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만약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육식을 지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동물이 식물을 먹고 인간이 다시 동물을 먹는 것에 비해 인간이 직접 식물을 먹어야 식물 소비를, 따라서 식물의 고통을,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고 믿고 있고 그 고통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육식을 줄여야 한다. 채식과 육식의 에너지 효율성 비교는 식물기반식의 효율성를 참고.
채식은 심지어 건강에도 좋다. 이에 대해서는 콜린 캠벨의 저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