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된 마음 (책)
“Analysis”라는 옥스포드 철학 저널 1998년 판에 실린 Andy Clark과 David Chalmers의 에세이.1 이를 계기로 체화된 인지 및 능동적 외재주의 등과 관련된 여러 논의들이 촉발되었다.
도입 Introduction
“마음이 끝나고 세상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두 가지 흔한 답으로 1) 피부와 두개골 안에 있는 것은 마음이고 그 밖에 있는 것은 세상이라는 관점과 2) 마음이 꼭 머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외재주의 관점이 있다. 외재주의 관점에 의하면 마음의 일부가 몸 밖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서 “일부”란 구체적인 철학적 입장에 따라 다양한데, 예를 들어 의미론적 외재주의는 단어의 의미가 사람의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능동적 외재주의라는 또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이 글의 목적. 능동적 외재주의에서는 인지 과정의 일부가 몸 외부(즉 환경)에 있을 뿐 아니라 환경의 역할이 몸 내부의 능동적 인지 과정에 대하여 단순히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환경 그 자체도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즉, 인지 과정이 몸 밖에 외재되어 있는데 그냥 있는게 아니라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라고 해서 “능동적” 외재주의라 불린다.
확장된 인지 Extended cognition
컴퓨터 화면에 어떤 도형과 도형을 꽂을 수 있는 소켓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 도형이 소켓에 맞는지 안맞는지를 맞추어야 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냥 평범한 심적 회전 과업이다. 피험자는 머리 속으로 도형을 이리저리 회전시키면서 소켓에 맞출 수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저자는 이 실험의 두 가지 변형을 제시한다.
- 첫번째 변형: 화면 속의 도형을 실제로 회전시켜볼 수 있는 버튼이 제공된다. 이제 피험자는 머리 속으로 상상을 하지 않고 단순히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도형을 돌려볼 수 있다.
- 두번째 변형: 버튼 대신 머리 속에 심을 수 있는 신경칩을 뇌에 심는다. 이제 피험자는 버튼을 누를 필요도 없이 그냥 생각만으로 컴퓨터에게 명령을 내려서 화면 속의 도형을 돌릴 수 있다.
이 세 가지 상황(평범한 세팅, 변형1, 변형2)에서 각각 어디까지를 인지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까? 질문을 약간 바꿔서, 각 상황에는 얼마만큼의 인지가 존재할까? 저자는 세 상황이 모두 동일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머리 안에 존재하는 것만 인지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신경칩은 분명 머리 안에 있으니 인지 과정으로 쳐야 한다. 만약 이를 인정하면 그 신경칩이 머리 밖에 버튼 형태로 존재한다고 해서 그걸 인지 과정으로 보지 말아야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한 실험(On Distinguishing Epistemic from Pragmatic Action)에서는 테트리스 게임을 하는 피험자를 관찰하여 (위 주장과 호환되는) 재미있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테트리스를 할 때 블럭을 회전시키는 행동에는 사실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하나는 실제로 도형을 돌리기 위해서 돌리는 실제 행동(pragmatic action)이고, 다른 하나는 도형이 맞는지 보기 위해 돌리는 인식적 행동(epistemic action)이다. 저자는 인식적 행동을 행동이라기보다 인지 과정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식적 행동의 결과로 새로운 정보가 만들어지거나 기존 정보가 변형되는데 이를 정보 자가 구축이라고 한다.
이 맥락에서 세상에는 단순히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과정 자체도 존재하며, 인식적 행동이란 세상이 문제 풀이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세상에 변형을 가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능동적 외재주의 Active externalism
위 논의를 기반으로 능동적 외재주의 입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인간과 환경은 양방향으로 상호작용하는 단일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 이 때 환경이 딱히 인간에 비해 더 수동적이라고 볼 이유가 없으며, 양쪽 모두 동등하게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아야 한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능동적 외재주의 관점이 일상의 다양한 행동들을 더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설명의 경제성은 좋은 이론의 특징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스크래블 게임(알파벳 조각을 가로세로로 맞추어 단어를 만들어내는 보드 게임)을 할 때, 자기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며 자기가 가진 알파벳 조각을 이리저리 재배열하고, 자기 순서가 왔을 때 특정 단어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어떤 인지적 프로세스가 일어난 것인지 설명하고자 할 때 “내적 인지 프로세스 및 일련의 긴 시각적 입력과 손의 움직임” 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타일의 재배열” 자체를 사고(즉, 인식적 행동)로 설명하는 게 더 합당하다는 주장이다.
(국내에는 Scrabble 게임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리 좋은 비유가 아닐 것 같다. 초보자들이 카드 게임을 할 때 자기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이리저리 옮겨보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인지에서 마음으로 From cognition to mind
위 사례에서는 (좁은 의미의) 인지 과정에 환경이 능동적으로 관여할 수 있음을 보였다. 저자는 이제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마음에 대한 능동적 외재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또다른 사고 실험을 도입한다.
오토(Otto)와 잉가(Inga)라는 두 사람이 있다. 오토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어서 장기 기억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토는 기억하고 싶은 모든 정보를 수첩에 적어두고, 항시 수첩을 확인한다.
두 사람 모두 새로 열린 전시를 보러 전시관에 가고 싶어 한다. 즉 동일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잉가는 전시관이 53번가에 있다는 걸 기억해내고 53번가를 향해 간다. 즉 전시관이 53번가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한편 오토는? 오토는 수첩을 꺼내서 전시관의 위치를 확인한 후에 53번가를 향해 간다. 결국 잉가와 오토 모두 전시장으로 가고 있다.
잉가와 오토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 잉가: 전시장에 가고 싶다. 전시장의 위치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여, 53번가로 이동
- 오토: 전시장에 가고 싶다. 전시장의 위치를 수첩에서 확인하고, 53번가로 이동
누군가가 “잉가가 왜 저쪽으로 가고 있지?”라고 묻는다면 누구나 당연히 “잉가는 전시관에 가고 싶어하는데, 전시관이 저쪽에 있다고 믿으니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오토가 왜 저쪽으로 가고 있지?”라고 묻는다면?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다.
- 첫번째: 오토는 전시관에 가고 싶어하는데, 전시관이 저쪽에 있다고 믿으니까.
- 두번째: 오토는 전시관에 가고 싶어하는데, 전시관의 위치가 수첩에 적혀 있다고 믿어서, 수첩을 확인해보니, 전시관에 저쪽에 있다고 적혀 있으니까.
저자가 이 사고 실험을 제안한 이유는 당연히 두번째 대답보다 첫번째 대답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관점에서는 오토가 수첩을 확인하는 행위를 구구절절하게 언급할 필요가 없다. 사실 잉가도 전시장의 위치가 53번가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생활하는 게 아니라 장기 기억에서 인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과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오토의 경우 그 과정이 외재화(즉 수첩 읽기)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 과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싶어지는데, 이게 사실은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실험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는 수첩이 오토의 장기 기억일 뿐 아니라, 수첩에 담겨 있는 게 오토의 믿음(belief)라는 것이다. 즉 오토의 믿음은 외재화되어 있다.
어떤 정보가 그저 정보가 아니라 믿음으로 작용하는 이유가 그 정보가 수행하는 역할에 달려 있다면, 그 역할이 꼭 머리 속에서만 수행되어야 한다고 간주할 이유가 없다:
The moral is that when it comes to belief, there is nothing sacred about skull and skin. What makes some information count as a belief is the role it plays, and there is no reason why the relevant role can be played only from inside the body.
위 인용에서 저자는 동등성 원칙을 인지적 과정 뿐 아니라 믿음 등 의식적 경험으로 확장하고 있다. 동등성 원칙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일부가 마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어떤 기능을 수행 한다면 이를 인지 과정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것.
If … a part of the world functions as a process which, were it to go on in the head, we would have no hesitation in accepting as part of the cognitive process, then that part of the world is (for that time) part of the cognitive process).
위 부분은 원래 글에는 없고, 저자 중 한 명인 앤디 클락이 이후에 쓴 책인 Supersizing the Mind에서 발췌했다.
바깥 경계를 넘어서 Beyond the outer limits
확장된 믿음
한편, 어떤 정보가 믿음이 되려면 다음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 해당 정보가 그 사람의 인생에 항상 함께하며, 이 정보를 참고해야하는 상황이 오면 거의 반드시 이를 참고하여 행동한다.
- 참고하고 싶을 때 어려움 없이 언제든 참고할 수 있어야 한다.
- 일단 그 정보를 참고하면 이를 의심없이 수용한다.
- 그 정보가 거기에 있는 이유는 과거 언젠가 한 번 그 내용을 신뢰해서 그곳에 그 정보를 수록했기 때문이다.
이 중 마지막 기준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무의식적으로 믿음이 형성되는 경우, 기억 조작이 일어난 경우 등), 앞의 세 가지는 믿음을 구성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다. 어떤 정보가 위와 같은 특성을 두루 가지고 있으면 그 정보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믿음이고, 오토의 수첩은 이를 모두 만족하기 때문에 확장된 믿음(extended belief)이다.
사회적으로 확장된 인지
사회적으로 확장된 인지도 가능할까? 즉 내 심적 상태의 일부가 다른 사람에게로 확장되어 존재할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 가능할 것. 서로 매우 의지하는 커플에 있어서 한 파트너의 믿음이 다른 파트너에게 오토의 수첩과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핵심은 높은 수준의 신뢰, 안정성, 그리고 접근성이다. 단골 레스토랑의 웨이터, 비서, 회계사, 동료 등이 그 역할을 일부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확장된 인지가 작동하려면 언어의 역할이 중요하다.
확장된 자아
확장된 자아extended self도 가능할까? 아마 그럴 것 같다. 우리 대부분은 이미 자아가 의식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점을 수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토의 수첩은 인지적 주체로써의 오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오토라는 사람을 생물학적 신체와 외부 자원(수첩)으로 구성된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보는 게 더 합당하다.
이 관점에는 중대한 윤리적 함의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