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xual function is not sexual motivation
성적 기능(sexual function)과 성적 동기(sexual motivation)는 다르다. 모든 성적 기능이 성적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성적 동기가 성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다윈은 자기 장식에 대한 본능이 인간의 보편적 본성의 일부로서 성선택을 통해 진화했으며, 대개 여성보다는 남성에게서 그런 경향이 더 자주 표현된다고 믿었다. 19세기 말에 허버트 스펜서는 다윈의 성선택 과정은 새의 깃털, 노래, 꽃, 인간의 몸을 비롯해 음악, 극, 소설, 시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 대부분을 잘 설명해준다고 주장했다. 1896년 자신의 저서 “패러독스”에서 막스 노르다우는 인간의 뇌 속에는 성적인 감정과 예술 생산을 담당하는 부분이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곳을 발전 기지라고 이름 붙였다. 프로이트는 예술을 승화된 성욕으로 보았다. …
이들은 … 성적 기능과 성적 동기을 혼동했던 프로이트의 중대한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다. 미술이 짝을 유혹하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꼭 섹스만을 주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주제라도 상관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이슬람의 기하학적 미술이나,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도널드 저드의 미니멀리즘 미술처럼 아예 주제 자체가 없어도 된다. 정자새에서 보았듯이 성선택된 장식 본능은 동기 측면에서나 감정 측면에서나 성선택된 성욕괴 관련이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 장식의 주체가 아름다운 장식이 성공적인 번식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을 필요조차 없다. 그것은 진화가 할 일이다. …
선사시대의 미술 작품들에는 성적 컨텐츠가 많다. 비너스의 입상은 큰 가슴과 큰 엉덩이로 표현되어 있다. 암각화의 모티브는 거의 여성의 성기다. 빙하기의 유럽인들은 뼈나 돌로 남근을 조각했다. 선사시대 시베리아에서는 스키를 탄 남자가 고라니와 성교하는 그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모두가 흥미롭지만, 미술의 진화에 관한 성선택 모델과는 별 상관이 없다.
미술에 대한 성선택이 우리 조상들이 인도의 탄트라 불교에서처럼 과잉 성욕을 드러내는 미술을 좋아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태여 조상들이 꼭 링감(힌두교의 남근상)과 요니(힌두교의 여음상)를 새기면서 온 산야를 돌아다녔을 필요도 없었다. 설령 그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관심의 반영일 뿐 적응상의 이익을 나타낸느 것은 아니다. 몇몇 정자새는 마치 남근처럼 크고 원뿔형으로 생긴 집을 짓는다. 또 어떤 정자새는 요니처럼 생긴 대로 모양의 집을 짓는다. 하지만 이런 모양은 성선택을 통한 진화와는 무관한 의미 없는 우연일 뿐이다.
—p412-417, The mating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