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
역사적 사실의 주관성:
흔히 사실은 스스로 이야기한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물론 진실이 아니다.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에만 이야기한다.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이며 그 서열이나 차례는 어떻게 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역사가이다. … 언젠가 탤것 파슨스 교수는 과학을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의 선택체계 (selective system of cognitive orientations to reality)‘라고 정의했다. 그것은 더 간단하게 표현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란 뭐니뭐니해도 바로 그런 것이다. 역사가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딱딱한 속알맹이가 객관적으로 그리고 역사가의 해석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믿음은 어리석은 오류이지만, 그러나 뿌리 뽑기는 매우 어려운 오류이다. …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에 관한 우리의 그림에 결함이 있는 이유는 주로 수많은 조각들이 우연히 분실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대체로 아테네시의 소수 집단에 의해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그림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특정한 견해에 물들어 있었던, 그리고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사실을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미 선택하고 이미 결정한 것일 뿐, 우연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근대에 쓰여진 중세사 책에서 중세인들이 종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읽을 때에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진실인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
제프리 배러클러프 교수 자신도 중세사 연구자로서 소양을 쌓은 사람이지만, 그는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비록 사실에 기초하고는 이다고 해도, 음격히 말하면 결코 사실 그것이 아니라 널리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p20-28, 역사란 무엇인가
문서로 남은 기록 역시 최초 기록자에 의해 선택되고 해석된 결과일 뿐:
만일 여러분이 문서들 안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한다면, 그 무엇인가는 정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무엇인가에 본격적으로 접근할 때, 이런 문서들 - 법령, 조약, 지대장장, 보고서, 공무상의 통신문, 사신과 일기 - 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 어떤 문서도 고작 우리에게 그 문서의 작성자가 생각한 것을 - 그가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을, 그가 일어나야만 했다고 생각하거나 일어나리라고 생각한 것을, 혹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생각해주기를 원했던 것만을, 혹은 심지어 자신이 생각했다고 자기 스스로가 생각한 것만을 -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p29, 역사란 무엇인가
모든 역사는 당대사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contemporary history)‘라고 선언했는데, 그것은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요한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만일 역사가가 평가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는 무엇이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p36,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의 특성들:
첫째,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항상 굴절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우리의 최초의 관심은 그 책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들이 아니라 그 책을 쓴 역사가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 사실들은 정말 생선장수의 좌판 우에 있는 생선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때로는 접근할 수 없는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고기와 같다; 그리고 역사가가 무엇을 잡아올릴 것인가는 때로는 우연에, 그러나 대게는 그가 바다의 어느 곳을 선택하여 낚시질하는지에, 그리고 어떤 닦시도구를 선택하여 사용하는지에 좌우될 것이다 - 물론 이 두가지 요소들은 그가 잡기 원하는 고기의 종류에 따라서 결정된다. 대체로 역사가는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사실들을 낚아올릴 것이다. …
두번째는 더욱 상식적인 것으로서,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내가 ‘공감(sympathy)‘이 아니라 상상적인 이해(imaginative understanding)‘라고 말한 이유는 공감이 동의(agreement)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9세기에 중세사 연구가 빈약했던 이유는 중세의 미신적 신앙들과 거기에서 비론된 야만행위들이 중세인에 대한 상상적인 이해를 너무나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
세번째로,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가도 그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사람이며, 인간의 존재조건 때문에 그 시대에 얽매일 수 밖에 없다. 그가 사용하는 바로 그 말들 - 민주주의, 제국, 전쟁, 혁명과 같은 말들 - 은 그 시대의 함축적인 의미들이 있고 그는 그 말들을 그것들과 분리시킬 수 없다. 고대사가들이 폴리스나 플렙스와 같은 말들을 원어대로 늘 사용해온 것은 바로 자신들은 그와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다고 그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역시 현재에 살고 있으며, 클라미스나 토가를 걸치고 강연한다고 해서 더 훌륭한 그리스 역사가나 로마의 역사가가 될 수 없듯이, 낯설거나 쓸모없게 된 단어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과거로 숨어들어갈 수는 없다. —p38-43,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적 객관성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See 역사의 객관성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 사이의 관계:
역사가의 곤경은 인간 본성을 반영한다. 인간은,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나 아주 늙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환경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으며 무조건 그것에 예속되지도 않는다. 그런 반면, 인간은 결코 그의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고 그것의 무조건적인 지배자일 수도 없다. 인간과 그의 환경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의 연구주제의 관계와 같다.역사가는 그의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이다. 연구 중에 있는 역사가가 잠시 일을 멈추고 나서 자신이 생각하고 글을 쓰는 동안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다 알 수 있듯이, 역사가느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어내고 또한 자신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p49-50, 역사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