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진화사에 기반한 식이 제안들
“인간이 어떠어떠하게 진화했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뭘 어떻게 먹어야 한다”는 류의 주장이 꾸준히 유행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논리적으로 취약하거나 근거가 부족하다.
사례들
팔레오 다이어트, Proper Human Diet, 케이브맨 다이어트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상업적으로 대단히 성공하여 책도 많이 팔리고, 온갖 강연과 유튜브 채널도 많다.
주장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 구석기 시대(약 250만 년 전 - 1.2만 년 전) 동안 인간은 수렵 채집을 하였고, 이 기간 동안의 식이는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신체는 이 식이 패턴에 잘 적응되어 있다.
- 신석기 혁명(약 1.2만 년 전) 이후 농업으로 인한 곡류 섭취 증가, 현대 산업 사회의 가공식품 등, 최근 약 1.2만 년 사이에 식이 패턴이 인위적으로 크게 바뀌었다.
- 새로 바뀐 식이 패턴에 대한 진화적 적응이 일어나기에 1.2만 년은 너무 짧다.
- 인간의 몸이 이미 가장 잘 적응된 식이 패턴을 따르는 것이 건강에 가장 좋다.
- 따라서 구석기 시대의 식이 패턴을 따르는 것이 건강에 가장 좋다.
문제점
엄밀한 기준에 따른 진화론적 가설은 새로운 발견을 돕거나, 여러 현상에 대한 일관적 설명을 제공하는 등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과학적 가설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중요한 전제가 필요하다.
- 그럴듯 하게 들리는 이야기가 다 타당한 진화적 가설이 되는 건 아니다. 새로운 가설은 되도록 진화적 분석의 계층에서 상위 수준에 놓인 이론들과 부합해야 하며, 널리 수용되는 기존 가설들과 내적 정합성이 되도록 높아야 한다.
- 가설에 따른 구체적 예측들이 반증가능해야 하며, 예측이 실험이나 관찰과 일치하지 않으면 가설을 고수할 게 아니라 아니라 실험과 관찰에 더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팔레오 다이어트나 Proper Human Diet 등을 지지하는 이들의 주장은 때때로 이러한 전제를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첫째, 지리에 따라 기후 및 가용한 식량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초기 인류의 식이는 매우 다양했기에 인간은 대단히 다양한 식이 패턴에 적응되어 있었다. 따라서 “구석기 시대의 전형적 식이”라는 걸 정의하기는 어렵다. 즉, 구석기 시대의 식이는 분산이 상당히 컸다.1
둘째, 현대 인류의 식이는 행동적, 사회적, 생리학적 학습에 의해 상당히 영향을 받으며 이러한 영향은 자궁 내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구석기 시대가 아니라 신석기 시대 이후의 유전적 적응이다. 즉, 이들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신석기 시대 이후에 진화적 변화가 적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12
셋째, 진화적 적응은 인간의 번식 및 번식을 위한 최소한의 생존에 맞춰져 있을 뿐, 인간의 장기적 웰빙에 맞춰져 있지 않다. 구석기 식이란 인간이 다른 이유로 죽지 않을 경우 약 50세까지 그럭저럭 살 수 있게 해주는 수준에 최적화되어있다. 참고로 현대의 산업화된 사회에서 인간의 기대 수명은 80세를 넘긴다. 추가적인 근거 없이 진화적 적응을 따르는 게 인간의 웰빙에 좋다고 주장하는 건 자연주의적 오류다.
넷째, 몇몇 이들은 진화적 가설이 관찰 및 실험 결과와 부합하지 않는 경우에도 가설을 고수하곤 한다. 예를 들어 Proper Human Diet: guidebook의 저자 켄 베리는 신석기 혁명 이전에 인간은 오트를 먹지 않았기에 오트가 몸에 좋을리 없다고 주장을 한다(그리고 생리적 메커니즘에 기반한 설명으로 주장을 부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반하는 실험 결과를 제시해도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3
구석기 다이어트는 건강에 해로운가?
영양학계에서 널리 수용되는 건강한 식이는 식물기반식, 지중해식, DASH식, 채식 등이다. 첨가물을 지양한다는 점, 되도록 덜 가공된 식품을 선호한다는 점 등에서는 구석기 다이어트와 유사하지만 몇 가지 차이가 있다.
- 육류: 구석기 다이어트는 식물기반식, 지중해식, DASH식, 채식 등에 비해 육류 섭취를 상대적으로 더 장려하는 편이다. 켄 베리는 베이컨이 염증을 일으킬 염려가 없는 안전한 음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4
- 통곡류 및 콩류: 구석기 다이어트에 따르면 통곡류와 콩류는 신석기 혁명 이후에야 널리 섭취되기 시작했으므로 인간이 먹기에 “자연스러운” 식량이 아니고 따라서 섭취를 지양하기를 권한다. 하지만 통곡류와 콩류는 식이섬유, 비타민, 단백질 등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급원이다.1
다만 팔레오 다이어트, Proper Human Diet, 케이브맨 다이어트 등이 건강에 해로운지 이로운지는 이 글의 초점이 아니다. 만약 팔레오 다이어트가 이롭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가 “구석기 시대에 획득된 진화적 적응을 잘 따르기 때문”은 아니라는 게 내가 하고픈 말이다. 만약 진화적 가설을 유지하려면 지금 논의되는 수준에 비해 훨씬 구체적이고 정교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인간이 어떠어떠하게 진화했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뭘 어떻게 먹어야 한다”는 류의 주장은 (적어도 지금 논의되는 수준으로는) 논리적으로도 취약하고, 근거도 부족하며, 실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 및 관찰과도 상충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