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의식역량
- 2025-09-04 (modified: 2025-09-17)
- 저자: AK
AI와 로봇이 모든 노동을 대신하게 되고 정말 운이 좋아서 분배 정의도 달성된 미래를 가정해보자. 전자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고 후자가 어렵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둘 다 달성이 됐다고 가정했을 때 여전히 인간들이 중요하다고 여길 가치는 뭘까에 대한 두서 없는 생각들을 글로 남겨 봤다.
최승준님의 2025년 9월 3일 글 “문해력의 가치가 0에 수렴할 때”를 읽고 “정말 문해력의 가치가 0에 수렴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하다가 기존에 품고 있던 이런저런 생각들(임금노예, 소외된 노동, 값비싼 신호 이론 등)을 연결지어 정리(?)했다.
부연
위 전제(AI와 로봇이 모든 노동을 대신하고 분배 정의가 달성된다)는 가정에 불과하다. 이 글의 목적은 그러한 전제가 달성될 가능성을 평가하거나, 전제가 달성된 사회가 좋은 사회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전제가 달성된 미래에 대한 사변일 뿐이다.
임금노예
미래 얘기를 하기 전에 현재 얘기를 잠깐 해보자.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임금 노동은 사실상 노예제(임금노예)나 다름없다고 본다.
자본가 입장에서 노예를 소유하는 건 여러모로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소유 대신 접근, 즉 임금 계약의 형태가 더 선호된다. 제러미 리프킨이 소유의 종말에서 주장한 내용과 비슷한 면이 있다. 다만 소비자가 거대 자본의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구도가 아니라,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의존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한편,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의존은 소유에서 접속으로의 전환에 따라 생겨난 건 아니고 원래부터 존재했다(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 및 여기에서 파생된 마르크스의 자본가-노동가 변증법). 헤겔-마르크스의 변증법과의 차이라면, 현재의 노동 계약에는 노동자에 의한 체제 전복 가능성이 거의 거세됐다는 점.
결국 임금 노동은 자본가 입장에서의 효율성은 높이고, 노동자에 대한 의존에서 기인하는 전복 가능성은 상당히 제거한 이상적인 노예제인 것 같다. 여기에 “노동은 신성한 의무이자 권리이다”라는 사상이 주입되면 더욱 강력한 통치 수단이 된다.
임금 노동에서의 해방
임금 노동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의 질이 크게 제약된 채 살아간다. 따라서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에 할애하는 상황 하에서 경험의 질을 끌어올릴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노동 자체가 신성한 것이라고 여기거나, 실제로 노동을 신성하게 만들거나, 노동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하는 등.
모두가 임금 노동에서 해방되고 분배 정의가 달성되면, 그래서 각 개인의 경험의 질이 사회적 계층에 의해 제약되지 않게 된다면, 우리의 경험은 각 개인이 가진 경험할 수 있는 역량(이하 “의식역량”이라고 하자)에 의해서만 제한될 것이다. 개개인의 의식역량만이 개인이 축적할 수 있는 문화 자본의 총량을 제약하는 요인이 된다.
의식역량은 유전, (넓은 의미에서의) 학습, 다양한 의료적/도구적 개입에 의한 증강 등의 영향을 받을텐데,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부익부빈익빈과 마찬가지로 양성 되먹임 고리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겠다. 능력주의의 결함도 고스란히 유지될 소지가 있다.
비교하려는 본능
소설 멋진 신세계의 소마soma 같은 걸 모두가 복용하지 않는 한, 인간이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하고 시기하는 심리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모든 노동과 생산이 자동화된 시대에도 여전히 희소한, 그래서 서로 비교하고 뽐낼 만한 그런 자원은 뭘까? 앞서 말한 의식역량(경험할 수 있는 역량) 및 이를 바탕으로 축적한 문화 자본이 그러한 “자원”이 될 것 같다. 자신의 뛰어난 의식역량, 그 역량으로 쌓아온 깊고 다양한 경험들, 그리고 그런 경험을 쌓은 사람과 같은 물리적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 경험, 이로 인해 더 깊게 쌓아 올린 문화 자본. 이런 것들이 뽐낼 만한 자원이 되지 않을까?
사실 지금도 이미 노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해방된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현대의 예술을 감상하려면 상당한 지식을 쌓아야 하는데, 이는 소스타인 베블런이 말하는 현시적 소비와 유사한 “현시적 지식”이다. 그리고 그런 예술을 소비할 줄 안다는 것을 드러내는 행동은 자신의 높은 의식 역량을 뽐내는 유효한 신호(값비싼 신호 이론)가 된다.
마르크스
생각해보니 마르크스도 19세기에 관련된 추측을 했더랬다.
그는 인간의 모든 감각이 사유 재산에 의해 저하되었다고 주장한다. 광물의 가치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닌 보석의 시장 가치에 의해 평가되는 식으로.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유 재산에 의해 소외된 상태에서 인간은 그저 소유하거나 다른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이외엔 물건의 가치를 이해할 수 없으며 사유 재산을 없애야만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된다. 음악을 아는 사람만 이를 감상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외되지 않은 사회적 인간만이 세상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참고: 마르크스: 짧은 소개)
의식역량의 차이에 의한 불평등
마르크스의 추측에 덧붙여서 생각을 이어보면 이렇다.
마르크스는 마치 공산주의 혁명이 완수되어 사유 재산이 없어지고 인간이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되면 인간의 창의성이 폭발하고 불평등도 해소될 것으로 여긴 것 같다.
하지만 제도나 문화가 바뀐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 혹은 그 발현이 완전히 바뀔리는 없다. 문화권에 따라 누구는 맥주를 마시고 누구는 와인을 마시지만 어떤 문화권에서도 석유를 마시지는 않는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당히 유연하지만 무한히 유연하지는 않다.
인간은 여전히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하고 시기할텐데 다만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재산” 이외의 다른 것으로 옮겨갈 뿐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달리 말하면 경쟁의 장소가 시장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옮겨갈 뿐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세상을 더 잘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해 보인다. 다만 여전히 인간의 경험을 제약하는 요소들이 있을 것이고 그 중 가장 중요한 제약 요인이 바로 개개인의 의식역량일 것이다. 일상이 잉여롭고 XR 장치들이 또는 뉴럴링크 같은 BCI 장치들이 좋은 콘텐츠를 오감으로 밀어넣고 똑똑한 AI가 인간에게 끝없이 고급 지식을 주입한다고 하더라도 개개인의 인간이 이를 소화할 수 있는 의식역량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이 차이가 또다른 불평등과 계급화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인간 본성에 담긴 서열화와 구별짓기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소할 적절한 설계가 없다면 AI와 로봇이 모든 노동을 대신하게 되고 정말 운이 좋아서 분배 정의가 달성되더라도 여전히 디스토피아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게 열려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