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 통치 반대 운동
1945-12-26-1946-02-01
동아일보 오보 논란:
해방 정국의 정치적 소용돌이와 갈등의 시작에는 동아일보의 왜곡 혹은 오보가 있었습니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의 핵심 내용은 조선 임시정부의 수립과 이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통한 신탁 통치의 실시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몇몇 국내 언론은 신탁 통치만 부각해 보도하면서 심지어 ‘소련이 신탁 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이 담긴 왜곡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결국 한반도의 여론과 민심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찬탁’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으로 나뉘어 극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지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 보다 정확히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45년 12월 29일 쯤이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신탁 통치를 제안한 쪽은 미국이었고 한반도 신탁 통치 안은 조선 임시정부와 미소공동위원회가 협의하에 실시하도록 되어 있어, 국제연합이 제시한 신탁 통치 방안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하지만 36년 동안 지독한 식민 지배를 경험한 조선인과 민족주의자에게 신탁통치는 식민 지배와 동의어였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 통치 안은 기존 국제연합의 신탁 통치와 달랐고 미-소 공동위원회와 조선 임시정부가 협의하는 것이었던 만큼, 우리 민족이 합심했으면 단기간의 신탁통치안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막 가혹한 일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조선 민중에게 당장의 독립에 대한 기대는 무엇보다 컸고, 이는 대다수가 바라는 바였습니다. 또 일부 언론의 왜곡 보도가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은 데다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읽지 못했습니다. 이에 더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반탁 운동을 이용한 친일 우익 정치 세력의 활동 등으로 반탁 운동은 해방 정국을 뒤흔들었고, 민족의 분열과 좌우 갈등을 부추겼습니다. —김현성, p28, 선거로 읽는 한국 정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