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동위원회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미소공동위원회는 일종의 타협책으로 “과거의 반탁 행위를 문제 삼지 않고 이제부터라도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협력하는 세력은 임시정부 수립 시 협의 대상에 포함시키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김규식, 여운형, 백남운 등 중도파는 먼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반탁 운동은 추후에 하자고 김구, 조소양, 김창숙 등을 설득했으나 이들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또 소련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한 박헌영 등의 공산주의 세력은 반탁 운동에 참가한 세력의 임시정부 가담을 배제하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입장 차이로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던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5월 12일에 재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자 미국은 같은 해 9월, 한반도 문제를 자국이 주도하는 유엔에 상정해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를 제안합니다. 이후 10월 21일, 소련 대표단이 철수함으로써 마침내 미소공동위원회는 최종 결렬되었고, 한반도 문제를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할 기회는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적으로 무산된 이유 중 하나는 임시정부에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의 범위를 놓고 여러 정치 세력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무렵 미소 냉전이 극심해지면서 미국의 외교 전략이 방향을 튼 것도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동유럽이 빠르게 공산화되자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을 발표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경제 부흥을 지원해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자 한 것입니다. —p33, 선거로 읽는 한국 정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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