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읽기

문학 읽기에 대한 생각.

목적과 수단의 구분

1995년 저서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 다치바나 다카시는 목적으로서의 독서와 수단으로서의 독서를 구분한다.

목적으로서의 독서란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자 즐거움인 책 읽기인데, 대표적인 예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단으로서의 독서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독서를 통해 책 속에 담겨 있는 지식이라든가 정보 혹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책을 읽는 것입니다. —p41

젊은 시절에는 오직 목적으로서의 독서가 중심이어서 대학 시절에 수업도 빠지고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원하는 책만 읽었습니다. … 그러니 이런 독서는 학창 시절에 한정된 것이었고, 이후에는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 논픽션 서적을 탐독하면서 문학가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살아 있는 현실과 비교할 때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학창 시절에 왜 그렇게 쓸데없는 책을 읽는 데 열중하였는지 도리어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p42-44

어릴 땐 나도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편이었는데 생각이 서서히 바뀌었고 지금은 위 입장에 매우 비판적이다.

잘못된 이분법

다카시의 구분에 의하면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목적으로서의 독서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자 즐거움이다. 반면 기술 서적 등 논픽션을 읽은 수단으로서의 독서이며 그 자체로 즐겁지는 않지만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게 잘못된 이분법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수단을 위한 독서’도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지어 RFC 같이 딱딱한 기술 명세서를 읽으면서도 지적 희열을 느낄 때가 있다. 앎이란 그 자체로 즐거운 (때로는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목적으로서의 독서’를 하면서도 ‘부수적’으로 얻는 바가 크다. 인간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지며, 세상을 더 다채롭게 보는 훈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훈련이라는 건 정말 ‘부수적’ 효과일까, 아니면 문학의 목적 그 자체이기도 한걸까? 구분하기 어렵다. 최근(2024-10)에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이런 측면을 더 깊게 깨달았다.

모든 작가가 교훈을 주려는 의도를 품고 글을 써야 한다거나, 모든 독자가 교훈을 얻으려는 ‘수단’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섬세한 글 읽기

간과 향이 강한 음식이 있고, 옅은 음식이 있는데 둘 다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맛이 강한 음식만 즐기던 사람이 심심한 음식을 먹으면 처음엔 맛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미묘한 향과 식감을 서서히 느낄 수 있게 된다.

칼 자르듯 구분하긴 어렵지만 문학에도 비슷한 구분이 있을 텐데 나는 그동안 주로 간과 향이 아주 강한, 소위 상업적인 문학들을 읽어 왔던 것 같다. 그나마도 거의 읽은 게 없지만.

은은하고 미묘하고 섬세한 글을 잘 음미하려면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2024-11) 다양하게 읽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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