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가능한 모듈성

  • 20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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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귀적 분해와 조립이 가능한 성질이나 모듈성 같은 성질(이하 모듈성)은 일반적으로 좋은 속성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좋다”란 무슨 뜻일까? 인간의 이해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 좋은 모듈성이란 무엇일까?

좋다는 게 무슨 뜻일까

좋음(good)에는 선함, 용도에 잘 맞음, 아름다움(참고: 타타르키비츠의 미학사 중 고졸기-고전기) 등의 의미가 섞여 있다.

공학적 설계 관점에서의 좋음에도 여러 뜻이 섞여 있는데 가장 중요한 성질 중 하나는 이해가능성이다. 재귀적 분해와 조합을 통해 인간은 복잡한 시스템을 환원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모듈화를 통해 복잡성을 감출 수 있다.


“좋음”이 인간(또는 다른 형태의 sentient beings)과 무관하다고 말하는 순간 이 “좋음”라는 건 가치 판단을 담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정의되어야 함. 일단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하는 성질”을 “좋음”으로 규정하자. 그러면 “재귀적 분해 가능성이나 모듈성이라는 속성을 가진 대상은 그런 속성을 가지지 못한 대상에 비해 세상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 된다. 도킨스가 말하는 안정자 생존(survival of the stable)과 연결하면 위 주장을 진화적인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비교적 정확한 사본을 빠르게 만들어내는 성질이 있는 대상은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런 대상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기 때문에 진화가 일어난다. 진화가 일어난다는 걸 두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주어진 생태에서의 적합도(fitness)가 높아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합도를 높게 유지하는 성질(진화가능성evolvability)이 높아지는 것. 비유하자면 각각 parameter와 hyperparameter에 얼추 대응된다. 앞에서 말한 재귀적 분해 가능성이나 모듈성은 진화가능성을 높이는 성질이기 때문에 진화적 설계의 산물에 종종 이러한 성질이 담기곤 한다. 인간과 전혀 다른 인지 구조를 가진 시스템이 같은 모구조를 발견하는지 여부보다는, 진화된 대상들(주로 생명체)에서 반복적으로 이러한 성질이 발견되는지를 따져보는 게 더 좋은 테스트이다. 한편 여기에서 말하는 재귀적 분해나 모듈성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아마도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의 엉킨 재귀적 위계나 기묘한 모듈 경계 같은 게 더 “좋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이해하는 재귀적 위계나 모듈성은 마치 직관물리(naive physics, folk physics)가 실제 물리 법칙에 대한 근사치인 것과 유사하게, 실제 자연에 존재하는 재귀적 위계나 모듈성에 대한 근사치에 불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