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sis"라는 옥스포드 철학 저널 <1998년> 판에 실린 [Andy Clark](/pages/Andy%20Clark.txt)과 의 에세이.[^1] 이를 계기로 [체화된 인지](/pages/Embodied%20cognition.txt) 및 <능동적 외재주의> 등과 관련된 여러 논의들이 촉발되었다. ## 도입 Introduction "마음이 끝나고 세상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두 가지 흔한 답으로 1) 피부와 두개골 안에 있는 것은 마음이고 그 밖에 있는 것은 세상이라는 관점과 2) 마음이 꼭 머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외재주의> 관점이 있다. 외재주의 관점에 의하면 마음의 일부가 몸 밖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서 "일부"란 구체적인 철학적 입장에 따라 다양한데, 예를 들어 <의미론적 외재주의>는 단어의 의미가 사람의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능동적 외재주의>라는 또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이 글의 목적. 능동적 외재주의에서는 <인지 과정>의 일부가 몸 외부(즉 환경)에 있을 뿐 아니라 환경의 역할이 몸 내부의 능동적 인지 과정에 대하여 단순히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환경 그 자체도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즉, 인지 과정이 몸 밖에 외재되어 있는데 그냥 있는게 아니라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라고 해서 "능동적" 외재주의라 불린다. ## 확장된 인지 Extended cognition 컴퓨터 화면에 어떤 도형과 도형을 꽂을 수 있는 소켓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 도형이 소켓에 맞는지 안맞는지를 맞추어야 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냥 평범한 <심적 회전> 과업이다. 피험자는 머리 속으로 도형을 이리저리 회전시키면서 소켓에 맞출 수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저자는 이 실험의 두 가지 변형을 제시한다. - 첫번째 변형: 화면 속의 도형을 실제로 회전시켜볼 수 있는 버튼이 제공된다. 이제 피험자는 머리 속으로 상상을 하지 않고 단순히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도형을 돌려볼 수 있다. - 두번째 변형: 버튼 대신 머리 속에 심을 수 있는 <신경칩>을 [뇌](/pages/Brain.txt)에 심는다. 이제 피험자는 버튼을 누를 필요도 없이 그냥 생각만으로 컴퓨터에게 명령을 내려서 화면 속의 도형을 돌릴 수 있다. 이 세 가지 상황(평범한 세팅, 변형1, 변형2)에서 각각 어디까지를 <인지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까? 질문을 약간 바꿔서, 각 상황에는 얼마만큼의 <인지>가 존재할까? 저자는 세 상황이 모두 동일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머리 안에 존재하는 것만 인지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신경칩은 분명 머리 안에 있으니 인지 과정으로 쳐야 한다. 만약 이를 인정하면 그 신경칩이 머리 밖에 버튼 형태로 존재한다고 해서 그걸 인지 과정으로 보지 말아야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한 실험([On Distinguishing Epistemic from Pragmatic Action](/pages/On%20distinguishing%20epistemic%20from%20pragmatic%20action.txt))에서는 <테트리스> 게임을 하는 피험자를 관찰하여 (위 주장과 호환되는) 재미있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테트리스를 할 때 블럭을 회전시키는 행동에는 사실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하나는 실제로 도형을 돌리기 위해서 돌리는 <실제 행동(pragmatic action)>이고, 다른 하나는 도형이 맞는지 보기 위해 돌리는 <인식적 행동(epistemic action)>이다. 저자는 인식적 행동을 행동이라기보다 <인지 과정>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식적 행동의 결과로 새로운 정보가 만들어지거나 기존 정보가 변형되는데 이를 [정보 자가 구축](/pages/Information%20self-structuring.txt)이라고 한다. 이 맥락에서 세상에는 단순히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과정 자체도 존재하며, 인식적 행동이란 세상이 문제 풀이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세상에 변형을 가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 능동적 외재주의 Active externalism 위 논의를 기반으로 능동적 외재주의 입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인간과 환경은 양방향으로 상호작용하는 단일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 이 때 환경이 딱히 인간에 비해 더 수동적이라고 볼 이유가 없으며, 양쪽 모두 동등하게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아야 한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능동적 외재주의> 관점이 일상의 다양한 행동들을 더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설명의 경제성은 좋은 이론의 특징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스크래블 게임>(알파벳 조각을 가로세로로 맞추어 단어를 만들어내는 <보드 게임>)을 할 때, 자기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며 자기가 가진 알파벳 조각을 이리저리 재배열하고, 자기 순서가 왔을 때 특정 단어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어떤 인지적 프로세스가 일어난 것인지 설명하고자 할 때 "내적 인지 프로세스 및 일련의 긴 시각적 입력과 손의 움직임" 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타일의 재배열" 자체를 사고(즉, <인식적 행동>)로 설명하는 게 더 합당하다는 주장이다. (국내에는 Scrabble 게임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리 좋은 비유가 아닐 것 같다. 초보자들이 카드 게임을 할 때 자기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이리저리 옮겨보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 인지에서 마음으로 From cognition to mind 위 사례에서는 (좁은 의미의) <인지 과정>에 환경이 능동적으로 관여할 수 있음을 보였다. 저자는 이제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마음에 대한 능동적 외재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또다른 <사고 실험>을 도입한다. 오토(Otto)와 잉가(Inga)라는 두 사람이 있다. 오토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어서 <장기 기억>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토는 기억하고 싶은 모든 정보를 수첩에 적어두고, 항시 수첩을 확인한다. 두 사람 모두 새로 열린 전시를 보러 전시관에 가고 싶어 한다. 즉 동일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잉가는 전시관이 53번가에 있다는 걸 기억해내고 53번가를 향해 간다. 즉 전시관이 53번가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한편 오토는? 오토는 수첩을 꺼내서 전시관의 위치를 확인한 후에 53번가를 향해 간다. 결국 잉가와 오토 모두 전시장으로 가고 있다. 잉가와 오토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 잉가: 전시장에 가고 싶다. 전시장의 위치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여, 53번가로 이동 - 오토: 전시장에 가고 싶다. 전시장의 위치를 수첩에서 확인하고, 53번가로 이동 누군가가 "잉가가 왜 저쪽으로 가고 있지?"라고 묻는다면 누구나 당연히 "잉가는 전시관에 가고 싶어하는데, 전시관이 저쪽에 있다고 믿으니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오토가 왜 저쪽으로 가고 있지?"라고 묻는다면?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다. - 첫번째: 오토는 전시관에 가고 싶어하는데, 전시관이 저쪽에 있다고 믿으니까. - 두번째: 오토는 전시관에 가고 싶어하는데, 전시관의 위치가 수첩에 적혀 있다고 믿어서, 수첩을 확인해보니, 전시관에 저쪽에 있다고 적혀 있으니까. 저자가 이 <사고 실험>을 제안한 이유는 당연히 두번째 대답보다 첫번째 대답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관점에서는 오토가 수첩을 확인하는 행위를 구구절절하게 언급할 필요가 없다. 사실 잉가도 전시장의 위치가 53번가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생활하는 게 아니라 <장기 기억>에서 인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과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오토의 경우 그 과정이 외재화(즉 수첩 읽기)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 과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싶어지는데, 이게 사실은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실험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는 수첩이 오토의 장기 기억일 뿐 아니라, 수첩에 담겨 있는 게 오토의 믿음(belief)라는 것이다. 즉 오토의 믿음은 외재화되어 있다. 어떤 정보가 그저 정보가 아니라 믿음으로 작용하는 이유가 그 정보가 수행하는 역할에 달려 있다면, 그 역할이 꼭 머리 속에서만 수행되어야 한다고 간주할 이유가 없다: > The moral is that when it comes to belief, there is nothing sacred about skull and skin. What makes some information count as a belief is the role it plays, and there is no reason why the relevant role can be played only from inside the body. 위 인용에서 저자는 [동등성 원칙](/pages/Parity%20principle.txt)을 인지적 과정 뿐 아니라 믿음 등 의식적 경험으로 확장하고 있다. 동등성 원칙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일부가 마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어떤 기능을 수행 한다면 이를 <인지 과정>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것. > If … a part of the world functions as a process which, were it to go on in the head, we would have no hesitation in accepting as part of the , then that part of the world is (for that time) part of the cognitive process). 위 부분은 원래 글에는 없고, 저자 중 한 명인 [앤디 클락](/pages/Andy%20Clark.txt)이 이후에 쓴 책인 [Supersizing the Mind](/pages/Supersizing%20the%20mind.txt)에서 발췌했다. ## 바깥 경계를 넘어서 Beyond the outer limits ### 확장된 믿음 한편, 어떤 정보가 믿음이 되려면 다음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1. 해당 정보가 그 사람의 인생에 항상 함께하며, 이 정보를 참고해야하는 상황이 오면 거의 반드시 이를 참고하여 행동한다. 2. 참고하고 싶을 때 어려움 없이 언제든 참고할 수 있어야 한다. 3. 일단 그 정보를 참고하면 이를 의심없이 수용한다. 4. 그 정보가 거기에 있는 이유는 과거 언젠가 한 번 그 내용을 신뢰해서 그곳에 그 정보를 수록했기 때문이다. 이 중 마지막 기준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무의식적으로 믿음이 형성되는 경우, 기억 조작이 일어난 경우 등), 앞의 세 가지는 믿음을 구성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다. 어떤 정보가 위와 같은 특성을 두루 가지고 있으면 그 정보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믿음이고, 오토의 수첩은 이를 모두 만족하기 때문에 [확장된 믿음](/pages/Extended%20belief.txt)이다. ### 사회적으로 확장된 인지 [사회적으로 확장된 인지](/pages/Socially%20extended%20cognition.txt)도 가능할까? 즉 내 심적 상태의 일부가 다른 사람에게로 확장되어 존재할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 가능할 것. 서로 매우 의지하는 커플에 있어서 한 파트너의 믿음이 다른 파트너에게 오토의 수첩과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핵심은 높은 수준의 신뢰, 안정성, 그리고 접근성이다. 단골 레스토랑의 웨이터, 비서, 회계사, 동료 등이 그 역할을 일부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확장된 인지가 작동하려면 언어의 역할이 중요하다. ### 확장된 자아 확장된 자아extended self도 가능할까? 아마 그럴 것 같다. 우리 대부분은 이미 자아가 의식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점을 수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토의 수첩은 인지적 주체로써의 오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오토라는 사람을 생물학적 신체와 외부 자원(수첩)으로 구성된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보는 게 더 합당하다. 이 관점에는 중대한 윤리적 함의가 담겨 있다. ## Footnotes [^1]: https://consc.net/papers/extended.html